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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Jun 23. 2024

Small girl fantasy

영지씨 저랑 술 한 잔 해요


Boy, I got a small girl fantasy

나는 작은 여자들에 대한 환상이 있어


Baby, would you still love me?

자기야, 그래도 날 사랑해 줄래?


Though I got a big laugh, big voice

& big personality

비록 내가 큰 웃음소리, 큰 목소리, 크고 시끄러운 성격을 가졌대도


Would you guarantee it?

사랑해 줄 수 있어?



와... 내일 영지 씨가 부산에서 깜짝 콘서트를 한다고 하면 당장 야간 기차 타고 달려가서 소리 지르고 싶어요. small girl fantasy 있는 여자 여기도 있어요!


  영지 씨 신곡 small girl 무한 반복 중이에요. 하루 만에 모든 가사를 따라 부르는 지경이 되었어요. 절 책임지세요. 우리 딱 맥주 한 잔만 합시다. 지금 눈앞에 안주도 푸짐하게 깔려있어요. 컵라면, 먹태깡, 편의점 닭튀김에 후식으로 초코크림빵도 대기 중이에요. 여기에 키 큰 여자 동지 한 명만 있으면 완벽한 토요일 밤이 될 텐데 말이에요. 영지 씨 어때요? 여기 와서 앉아봐요. 우리 키 큰 여자끼리 얘기 좀 해요.



  오늘 낮에 운전하면서 노래 따라 부르다가 제가 울먹이고 있길래 깜짝 놀랐어요. 이게 뭐지? 뮤직비디오 댓글에 노래 듣고 울었다는 사람들 보고 그 정도일까 싶었는데 그 정도였나 봐요. 이젠 외모컴플렉스에서 꽤 자유로워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저는 유치원 때부터 눈에 띄게 컸어요. 마트에 가면 우리 아빠만 솟아있어서 찾기 쉬웠는데 제가 그 딸이잖아요. 입학식에도 졸업식에도 항상 맨 뒤에 서 있는 여자애를 찾으면 저였어요.


  큰 덩치가 부끄러웠던 첫 기억은 유치원 재롱잔치 때였어요. 여자아이들에게 발레복을 입혔는데 저만 그 옷이 심각하게 작았어요. 팔도 짧고 치마도 짧고 배꼽도 훤히 보여서 우스꽝스러웠어요. 저 어린 시절 기억은 거의 못하는 편이거든요? 근데 그날은 또렷해요. 조명도 눈부시고 사람들이 날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아서 힘들었어요. 그때 찍은 사진이 있는데 엄마 아빠는 그걸 보고 웃지만 저는 슬퍼지고 말아요. 부모님은 아실까요?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딸이 자기 모습에 자신이 없었다는 걸.


  영지 씨도 손발이 큰가요? 전 저보다 손이 큰 여자를 본 적이 없어요(저보다 손 작은 남자는 많이 봤어요). 제 큰 손을 발견하고 다들 한 번씩 대보더니 나중에 손 엄청 큰 남자 만나야겠대요. 손 작은 사람이랑 대보라고 하더니 제 손은 아빠 손 같대요.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요. 그리고 저는 그게 왜 거슬리는 걸까요. 영양가 없는 말들 흘려들으면 좋을 텐데.



  키가 크다는 말은 어릴 때부터 워낙 많이 들었는데 보통 뒤가 생략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부럽다는 것도 아니고 예쁘다는 말도 아니었어요. 다들 무슨 말을 삼켰을까요? 나이가 어려도 말의 뉘앙스는 알잖아요. 저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거든요.


  발 크기는 255라서 보통 여자 신발 사이즈가 없어요. 최대한 굽이 없는 걸로 찾았죠. 이태원의 외국 신발 가게를 돌아다녀 보기도 했어요. 제게 맞는 구두나 단화는 맞추려면 값이 비쌌어요. 그래서 주로 남녀공용 운동화를 신었죠. 나만 왜 이렇게 신발 하나 사는 것도 힘들까 싶었죠. 영지 씨는 발 사이즈가 몇이에요?


  엄마는 딸이 늘씬해서 좋다고 하면서도 제 덩치가 작아 보이는 옷을 입히거나 발이 작아 보이는 신발을 신기고 싶어 하셨어요. 사진을 찍을 땐 커다란 손이 안 보이도록 하거나 손끝을 동그랗게 모으라고 하셨죠. "왜 아담하게 보여야 해?"라고 따지듯이 물었지만 저도 알고 있었어요. 제 손과 발 크기가 '여성스럽지' 않다는 걸. 엄마한테는 투덜댔지만 나중엔 제가 알아서 손을 가리고 사진을 찍고 있더라고요.


  이성 관계에서도 쪼그라들어 있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날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나 좋다고 하는 사람 중에 쉽게 사귈 때가 많았어요. 유별난 나를 이렇게 좋아해 줄 사람이 또 있을까 하고요. 그런데 또 있던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들이 제일 아까워요. 아예 짝사랑이 나았을 거예요. 거절당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먼저 다가가봤으면 어땠을까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로 위태로운 자존감을 세웠던 제20대가 안쓰러워요. 영지 씨의 연애들은 어땠어요?


  다행히 이제는 이젠 저 좋다는 사람이라도 제가 아니다 싶으면 안 만나요. 운동도 열심히 해보고 있는데 제 운동 목표는 다이어트가 아니라 각 잡힌 팔 굽혀 펴기를 스무 번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걸로 잡았어요. 저한테 안 어울리는 짧은 치마나 멜빵바지도 사지 않아요. 대신 길쭉한 다리가 돋보이는 통 큰 바지를 즐겨 입어요.


  지금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데 키가 큰 게 꽤 도움이 돼요. 6학년 아이들은 저보다 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가 키로는 밀리지(?) 않을 수 있거든요. 칠판도 위쪽까지 알뜰하게 쓸 수 있답니다. '여성스러움'이라는 틀에 맞추지 않으면 제 큰 키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근사할 수 있다는 걸 하루하루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이젠 괜찮아진 줄 알았단 말이에요. 키 큰 내 모습 그대로 잘 보듬으며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근데 영지 씨 노래를 듣는데 왜 이렇게 울컥하냐고요. 과거의 내 모습이 안쓰러운 걸까요? 아니면 지금도 괜찮은 척 지내고 있는 걸까요?


small girl fantasy는 어쩌면 평생 극복할 수는 없는 걸까요? 제가 아직 미혼이라 그럴까요? 결혼을 해서 완전 내 편이 생기면 안정이 될까요? 아예 비혼 선언을 하면 자유로워질까요? 제가 자꾸 질문을 하는 모습이 영지 씨 노래 가사랑 비슷하네요. Would you guarantee it?


  키 큰 여자가 가지는 열등감이나 조바심을 이렇게 대놓고 노래로 만들어버리다니 역시 당신은 빛나요. 영지 씨 팬은 저 말고도 차고 넘치지만 무엇보다 영지 씨가 스스로 팬이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같은 키 큰 여자라서 든든하고 자랑스러워요. 근사한 노래로 키 큰 여자 샤우팅 해줘서 고맙습니다. 저도 영지 씨에게 자랑스러운 동지가 되어볼게요.


저 영지씨랑 짠 한 번 하고 싶은데 잔 좀 들어줄래요?  이영지 Small girl 대박을 위하여! 빌보드 진출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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