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씨 저랑 술 한 잔 해요
Boy, I got a small girl fantasy
나는 작은 여자들에 대한 환상이 있어
Baby, would you still love me?
자기야, 그래도 날 사랑해 줄래?
Though I got a big laugh, big voice
& big personality
비록 내가 큰 웃음소리, 큰 목소리, 크고 시끄러운 성격을 가졌대도
Would you guarantee it?
사랑해 줄 수 있어?
저... 내일 영지 씨가 저 멀리 부산에서 깜짝 콘서트를 한다고 해도 당장 기차 타고 달려갈 수 있어요. 맨 앞줄에서 팡팡 뛰며 소리 지르고 싶어요. Small girl fantasy 있는 키 큰 여자 여기 한 명 추가요!
영지 씨 신곡 'small girl'을 아침에 유산균 한 알 챙겨 먹을 때부터 자기 전 일기 쓸 때까지 무한 반복으로 듣고 있어요. 하루 만에 모든 가사를 따라 흥얼거리는 지경이 되었어요. 절 책임지세요. 우리 딱 맥주 한 잔만 합시다. 안주도 푸짐하게 준비할게요. 마라탕, 뿌링클 치킨, 도넛 좋아하는 것 맞죠? 요새 영지씨 먹방까지 다 챙겨보다가 저도 마라탕을 자주 먹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책임지세요. 키 큰 여자 동지 한 명만 있으면 완벽한 토요일 밤이 될 것 같단 말이에요. 어때요? 잠깐 여기 와서 앉아 봐요. 저 원래 이렇게 질척거리는 사람 아니에요. 우리 엄마한테 물어보세요. 오늘 낮에 운전하면서 small girl 노래 따라 부르다가 제가 울먹이고 있길래 '에잉? 너 왜 이래?' 했어요. 노래 듣다가 울었다는 뮤직비디오 댓글들 많길래 그건 오버다 싶었는데 이게 뭔가요. 키 큰 여자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워진 줄 알았는데 그런 척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영지씨도 어릴 때부터 키가 컸나요? 저 초등학교 입학식 때는 키 순으로 줄을 세웠어요. 그때부터 고등학교 졸업식 때까지 항상 맨 뒤에 서있었답니다. 마트에 가면 우리 아빠 왕머리만 높이 솟아있어서 찾기 쉬운데 제가 그 딸이니까 자연스러운 전개였지요(왕머리까지 닮을 필요는 없잖아요). 큰 키가 부끄러웠던 첫 기억은 유치원 재롱잔치 때였어요. 여자 아이들에게 발레복을 입혔는데 저한테만 옷이 많이 작았어요. 팔 소매나 치마 길이도 짧고 배꼽도 훤히 보이는 모습이 터진 소시지처럼 우스꽝스러웠어요. 어린 시절 기억을 거의 못하는 편이거든요? 근데 그날 기억은 쓸데없이 선명해요. 무대를 비추는 조명이 눈부셔서 관객들 입모양만 보였어요. 다들 날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아서 발레 공연이고 뭐고 손짚고 옆돌기해서 도망치고 싶었던 심정이었어요. 엄마 아빠는 그 날 찍은 사진을 보고 귀엽다는데 저는 지금도 마음 한 켠이 내려앉고 말아요. 부모님은 아실까요? 그날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최근까지도, 딸이 터진 소시지가 된 기분으로 살아왔다는 걸.
영지 씨도 손발이 큰가요? 전 저보다 손이 큰 여자를 본 적이 없어요. 다들 한 번씩 제 손 크기를 견주어보고는 나중에 손 엄청 큰 남자 만나야겠대요. 영양가 없는 말들 흘려들으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했어요. '그런 남자 소개나 시켜주면서 말 할 것이지.'하고 속으로 삐죽거렸어요. 엄마는 딸이 키 크고 늘씬해서 좋다면서도 제가 덩치가 작아 보이는 옷을 입거나 발이 작아 보이는 신발을 신길 바라셨어요. "엄마, 이 신발 꽉 끼고 답답해서 오래 못 신어."라고 하면 "데이트할 때만 신어. 잠깐만 참으면 되잖아."라고 하셨죠. 사진을 찍을 땐 손이 안 보이도록 가리거나 손끝을 동그랗게 오므리라고 하셨어요. "왜 꼭 아담하게 보여야 해?"라고 따지듯이 물었지만 저도 알고 있었어요. 제 손발 크기가 '여성스럽지' 않다는 걸. 엄마 앞에서는 짜증만 실컷 냈지만 나중에는 제가 알아서 손을 숨기고 사진을 찍었어요. 겨울엔 손바닥을 살짝 가려주는 팔이 긴 니트 입는 걸 좋아했어요. 그럼 손이 좀 작아보일까 싶었거든요.
이성 관계에서는 잔뜩 주눅들어 있는 'Small girl'이었어요. 자기보다 키 큰 여자 옆에 자연스럽게 서있을 수 있는 그릇 큰 남자는 별로 없잖아요. 또, 키 큰 남자는 인기가 많고요. 그렇다고 제가 모델처럼 빼빼 마르고 스타일리시한 것도 아니었단 말이죠? 스무 살에 처음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얼마나 짜릿했는지 십 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 사람이 살던 동네를 지날 때면 옷매무새를 살펴봐요. 짧은 인연이었지만 나도 있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해 준 사람이라서요. 그 사람을 잃고 나서는 오랜 시간을 방황했어요. 나를 사랑해 줄 다른 사람을 찾아 다녔죠. 나 좋다고 하면 일단 관심이 생겼어요. 온 관심을 연애에 쏟은 탓에 이십 대 내내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 적은 거의 없었죠. 영지씨한테도 이게 자랑처럼 들릴까요? 친구들은 팜므파탈이다 뭐다 하는데 저는 부끄럽기만해요. 어설픈 인연들로 결핍을 채울 수 없는 건데 너무 오랜 시간을 헤맷어요. 엄청 똑똑한 척 하고 다녔는데 남자한테 사랑 받아야 안심이 되는 반쪽짜리 자존감 이었던거죠. 영지씨처럼 대놓고 불안한 마음을 꺼내놨으면 좀 나았을까요? 빛나는 그 시절의 에너지를 나를 살피는데 썼으면 어땠을까요? 저의 이십대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날들이 더 많아요. 아직 한참 남은 영지씨의 이십 대는 달랐으면 좋겠네요. 방금 좀 키 큰 꼰대 같았어요?
지금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데 키가 큰 게 꽤 도움이 돼요. 요즘 애들 키 크다고 하는데 그래도 키로 밀리지 않을 수 있거든요. 입만 좀 다물고 있으면 학기 초에는 아이들이 꽤 긴장하기도 한답니다. 물론 입 열기 시작하고 허당끼가 들통나면 금세 물렁탱이가 되어버리지만 말이에요. 칠판도 위쪽까지 알뜰하게 쓰고 닦을 수 있어요. '여성스러움' 대신 '선생님'이라는 틀에 맞추어보니 제 키는 쓸모가 많아졌어요. 그래서 이젠 괜찮아진 줄 알았단 말이에요. 내 모습 그대로 보듬으며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근데 영지 씨 노래를 듣는데 왜 이렇게 울컥하냐고요. 과거의 내 모습이 이제야 안쓰러운 걸까요? 아니면 지금도 괜찮은 '척' 지내고 있는 걸까요? Small girl fantasy는 어쩌면 평생 극복할 수는 없는 걸까요? 제가 아직 미혼이라 그럴까요? 아얘 비혼이면 자유로워질까요? 그러고 보니 제 질문들이 영지 씨 노래 가사랑 비슷하네요. Would you guarantee it? '이래도 나 사랑 받을 수 있어?'
키 큰 여자가 가지는 열등감과 조바심을 이렇게 대놓고 가사로 써버리다니! 역시 당신은 수줍은 척 하지만 빛나는 영지소녀예요. 영지씨를 응원하는 사람은 저 말고도 차고 넘치지만 무엇보다 영지 씨가 스스로 팬이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사는 키 큰 여자로서 든든하고 자랑스러워요. 근사한 노래로 대표로 샤우팅 해줘서 고맙습니다. 저도 영지 씨에게 자랑스러운 동지가 되어볼게요. 일곱 살 때 작은 발레복을 입고 터진 소시지처럼 서있던 무대 따위는 발라버릴 수 있게요. 통이 큰 셔츠와 와이드팬츠를 입고, 발이 편한 볼 넓은 신발을 신고 칠판 앞을 무대로 날아다녀볼게요.
이쯤에서 짠 한 번 하고 싶은데 잔 좀 들어줄래요? 이영지 Small girl 빌보드 진출을 위하여! 우월한 유전자를 감당할 방법을 몰라 헤맷던 키 큰 여성 동지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