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람티 Jun 16. 2024

완두콩으로 삼행시를 지어보겠어요


완, 연한 여름이 오기 전에

두, 두둑 장맛비가 떨어지기 전에

콩, 콩콩 분주하게 시장 바닥을 뒤지고 다녔지요

  1년 중에 집 주변 시장을 찾는 발걸음이 가장 분주한 때다. 완두콩, 산딸기, 오디, 마늘종, 햇감자. 발음만 해보아도 싱그러운 초여름의 열매들을 성실하게 입속으로 거둬들일 때다.

  지난주 주말에는 작정하고 현금을 두둑이 뽑아 집 주변 시장을 찾았다. 과일 채소의 가격이 그나마 저렴해져서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었다. 뉴질랜드 단호박이 한 통에 천 원이라니 무거워도 얼른 챙겼다. 아직 시큼한 천도복숭아는 둘째 동생이 좋아할 것 같아서 한 바구니 샀다. 포슬포슬한 햇감자를 쪄서 설탕에 찍어 먹을 생각에 눈이 멀어 한 바구니 또 추가되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이 구역의 큰 손이었다.

  언제봐도 신기하게 생긴 뽕나무 열매 오디도 영롱한 보랏빛으로 나를 유혹했다. 오디까지는 사치일까 싶어 자꾸 주변을 맴돌다가 지금 밖에 못 먹는다는 아주머니의 한정판 마케팅에 넘어갔다. 에이 저도 알죠 오디 귀한 거. 여름 방학에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사촌 오빠들만 오디 주스 갈아주셨거든요. 결국 오디도 한 팩 샀다.

  "오디로 갔나 오디로 갔나 오디로~ 오디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실없는 노랫말이 흘러나왔다. 초여름으로 가득한 끌차는 땀이 뻘뻘나도록 무거웠지만 한없이 가벼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오디를 씻어 혓바닥이 검어지도록 쪽쪽 빨아먹었다. 민숭한 단맛이 퍽 맘에 들었다. 할머니 내가 6월마다 오디 꼭 챙겨먹을게요. 혹시 뒤돌아보니 미안하시거든 걱정마세요.

  어제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디저트로 케이크 대신 산딸기를 한 박스를 사서 갔다. 평소에 자주 들리는 믿음직한 과일 가게에서 빛깔이 고운 산딸기가 반짝거리고 있는데 지나칠 수가 있을까. 산딸기가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들고 간다고 꽤 용을 썼다. 그래도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산딸기의 맛을 벗과 함께 음미하고 있는 것이 내게는 낭만이라.

  오늘의 낭만은 완두콩이었다. 주말에 부모님댁에 도착해  밥솥을 열었더니 녹색 완두콩이 잔뜩 박혀있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완두콩의 단맛이 이렇게나 매력적이었던가. 요즘 해마다 입맛이 변하는데 올여름엔 완두콩이 내게 다가오려나보다 싶었다. 완두콩을 듬뿍 넣은 밥을 여름 내내 먹고 싶어졌다. 겨울나기를 위해 도토리를 모아두는 다람쥐처럼 나는 한 여름 나기를 위해 냉동실에 완두콩을 쌓아두기로 했다. 오늘도 시장으로 향했다.

  까놓은 완두콩이 작은 바구니에 5천원인데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여름 내내 완두콩 밥을 먹기로 결심한 사람 아닌가. 완두콩은 초록색 망에 채워 '관'이라는 단위로 팔고 한 관은 3.75kg이라고 한다. 오늘의 시세는 한 관당 만 오천 원 정도 되었고 나는 통 크게 만 오천 원치 완두콩을 샀다.

   한 관의 완두콩을 쟁반에 펼쳐놓으니 양이 더 많아 보였다. 완두콩으로 키즈카페에 있는 볼풀장 같은 것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세였다. 밥만 해먹어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검색해 보니 완두콩 수프나 완두콩 빵 레시피도 있었다. 완두콩 스프는 얼마나 고소할까? 완두콩 빵을 만들 땐 꿀을 듬뿍 넣어 달달하게 먹어야지. 점점 일이 커지고 있었다. 완두콩 밥도 해먹고 수프도 해먹고 빵도 해먹다 보면 점점 길어지는 여름도 금세 끝나있을 것 같은 기분.

  행복한 상상은 잠시 접어두고 일단은 싱싱할 때 꼬투리를 까서 얼려놓는 작업이 먼저였다. 식구들을 불러 도와달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딸,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을거야?"

"밥도 하고 수프도 하고 빵도 할거야. 같이 까주면 옆에서 얻어먹게 해줄게?"

"와~ 우리 딸 덕분에 맛있는거 먹겠다! 여보, 와서 같이 완두콩 같이 까요!"

  일을 벌리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는데 엄마의 응원을 받으니 힘이 났다. 초여름날의 느슨한 오후에 함께하기 딱 좋은 소일거리였다. 식사할 때 말고 가족끼리 둘러앉아 사부작거리는 모습이 오랜만이었다. 꼬투리를 까는 손이 점점 느려졌지만 오히려 좋았다. 나는 어제 산 산딸기를 요거트에 넣어 일꾼들의 새참으로 제공했다. 욕심내서 완두콩 잔뜩 사온 게 잘 했다 싶은 날이었다.



이전 20화 선생님 똥 얘기좀 그만 하세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