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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May 18. 2024

검은 점, 검은 파도, 검은 바다(1)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주말 나들이를 나온 몰골은 아니었다. 민영과 나는 더위에 지친 한 쌍의 까마귀였다. 검은색 티셔츠, 팔토시, 모자, 운동화까지 신고 냉면 집에 들어섰다. 피부는 선크림과 땀이 만나 번들거렸고 눈빛도 퀭해서 한참 밖에 있다가 온 티가 났다.     

     

“여기 물냉 두 개 주세요! “     

“와~ 쇼핑몰 식당가에 온통 검정 인간들이네. 이상해. 뭉클하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묘하네. 오늘이 제일 인원 많은 것 같던데 몇 명이나 왔을까?”     

“방금 게시판에 떴는데 육만 명이래. 집회 때마다 만 명씩 늘어.”     

“대박이네. 솔직히 토요일마다 집회 나오면서 얼마나 소용 있으려나 싶었는데… 이번엔 진짜 뭐 좀 바뀌려나?”     


 민영은 오늘 아침 남편과 구직 사이트를 살펴보았다고 했다. 교사 자격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없어서 남편이랑 이참에 같이 회사 때려치우고 부부 도배단이나 부부 양봉단을 해볼까, 이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부부 도배단이 제일 가능성 있네. 너 손재주 좋고 꼼꼼하잖아.”     

 “근데 그거는 안 될 것 같아. 나 허리 약해서 디스크 바로 올 듯.”     

 “아 맞네. 그럼 너는 페인트만 섞고 남편한테 칠하라고 해!”     

 “너 김밥집 차린다며. 그럼 나는 그 옆에서 탕수육집 하는 거 어때? 김밥 사면 탕수육 할인해 주고 탕수육 사면 김밥 할인해 준다고 하는 거야.”     

 “좋은데? 팔고 남는 음식은 바꿔 먹으면 되겠다. 그럼 굶어 죽진 않겠지 크크. 근데 보증금은 언제 모으냐…”    

 “우리 월급으로 벌써 보증금을 어떻게 모아. 버티다가 진짜 힘들면 일단 그만두고 초등 학원 강사를 하는 거야. 거기는 받아주지 않을까? 보증금 마련할 때까지만 버티는 거지.”   

       

 헛소리인 줄 알면서도 그해 여름 우리는 만나면 어떻게 하면 선생질을 그만두어도 먹고살 수 있는가에 대해 열띤 토의를 했다. 원래부터 나는 몸 건강할 때 명예퇴직해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김밥집을 차리는 것이 나름의 인생 계획이었다. 가끔 교직에 회의를 느낄 때면 김밥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김밥 말기 연습을 하며 교직을 홀연히 떠날 날을 나름 치밀하게 대비했다. 민영은 나의 진지한 노후 준비를 비웃는 쪽이었는데 이제는 내 김밥집 옆에 탕수육 집을 차릴 궁리를 하고 있었다. 어떤 결론도 나지 않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만 잔뜩 나누었다. 그렇지만 그런 아무 말이라도 내뱉으면서 불안을 떨쳐내는 것이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해 민영은 이전 담임이 학교폭력 사건을 처리하다 지쳐서 휴직을 낸 반을 맡게 됐다. 학교에서 서로 미루던 자리를 이제 병아리 신규 교사에게 떠넘긴 것이었다. 저경력 교사에게 폭탄 넘기기는 많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녀는 다양한 놀이를 준비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 보기도 하고, 규칙도 새로 만들어보고, 수업 자료도 정성껏 준비했다. 그렇지만 이미 어수선한 반의 분위기를 중간에 바꾸기는 어려웠다. 반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영에게는 스트레스성 두통과 생리불순 등 좋지 않은 징조들이 나타났다. 그녀는 내가 징징대고 있을 때면 해결사처럼 나타나는 똑똑이 친구였다. 엄마랑 싸우고 속상할 때도, 새로 노트북을 살 때도 일단 뭐든 민영에게 전화해서 상담하면 뭔가 안심이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에게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걸까?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민영은 학교가 전체적으로 난장판이라 자기 반은 좀 나은 거라고 했다. 학부모 민원도 심한 지역이고 옆 반 선생님은 학생한테 종종 욕지거리를 들으며 사는데 밖에 알려지면 자신이 무능력해 보일까 봐 버티고 있다고 했다. “이번 사건 터졌을 때 자꾸 눈물만 나고 밤에 잠도 잘 안 오더라. 나한테는 남 일 같지 않아…” 민영은 나보다 훨씬 먼저, 꾸준히 집회에 나갔다.          


 나는 운 좋게 무난한(=학부모 민원이 적고 경제력 차이가 심하지 않은) 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카더라’ 통신으로만 다른 학교에서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사건들을 접했다. 민영이 겪은 일들을 들으며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장 내 앞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일단 올해는 괜찮아.’, ‘민영은 나랑 달리 칼 같은 스타일이라 애들이 느끼기에 좀 엄했을지도 몰라.’ 이렇게 나는 수렁에 빠진 그녀와 나를 최대한 구분 지으려고 애썼다. 어쨌든 나는 안전선 밖에 있으니 아직은, 올해는, 일단 넘겨보자며 슬슬 발을 뺐다. 한 마디로 치사 팬티였다.        

  

 서울 서이초에서 신규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도 처음엔 뉴스거리 중 하나였다. 일 학기 성적 마무리와 방학 준비로 바쁜 시기였다. 처음 뉴스를 접했을 때 든 생각은 ‘그냥 잠깐 쉬던가 일을 때려치우지 왜 죽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저 어린 사회 초년생의 잘못된 선택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해당 학교 앞을 직접 찾아가 조문하고 미안하다며 흐느끼는 선생님들을 보며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학기 말 성적 처리를 실수 없이 마무리하고 아이들에게 방학식 때 줄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더 큰 관심사였다. 내 공감 능력이 여기까지 인가 보다 싶었다.     

     

방학식 하루 전날까지만 해도 몰랐다. 내가 여름방학 내내 국회의사당 앞의 길바닥에 앉아 눈물 콧물 다 흘리며 피켓을 들고 있을 줄은. 



  “너희 반은 괜찮아? 뉴스 보니까 한국 학교 제정신이 아니던데? 옛날에 우리도 중학교 때 맞았잖아. 왜 이런 걸로 맞아야 하나 싶었어도 학교 꼴이 지금보다는 그때가 나았던 것 같아... 너는 학교 다닐 때도 맞고 이제는 애들한테도 맞고 살아야 되냐?”     


 미국에 이민 가서 사는 친구한테까지 소식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집회 관련 뉴스를 봤다며 연락이 왔다. 그해 여름에는 학교 밖에서 누굴 만나도 결국 이야기는 ‘그 사건’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때마다 “아직은, 운이 좋아서, 괜찮아.”라고 답할 뿐이었다.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다. 큰돈은 못 벌어도 선한 영향력을 가진 직업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누가 무서워서 선생님 하겠냐.'와 같은 개탄과 함께 응원의 목소리도 들려왔지만 가슴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이초 교사 사건에 이어 드러난 멍자국들이 나뿐만 아니라 세상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교사라는 직업이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된 것 같았다. '난 이제 이 년 차인데 침몰하는 배에 탄 건가? 잘못된 진로 선택을 한 건가?'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학기 말에 일이 몰리면서 상념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남아 있는 에너지를 긁어모아 숨이 턱까지 찼을 때 어김없이 방학식이 마라톤 결승선처럼 찾아왔다. 여름 방학을 하는 날 교실을 정리하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집에 도착했다. '한 학기 무사히 마쳤네.'라는 감상보다는 몰려드는 허기에 신발을 벗어던지고 라면 물부터 올려놓았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추천 동영상 목록에서 서이초 교사 추모 집회 영상을 처음으로 제대로 봤다. 마음을 깊이 쓰고 싶지 않아서 의식적으로 피했었는데 그날은 방학도 했겠다 싶었는지 홀린 듯 영상을 클릭했다.     


  “저는 다음 주에 명예퇴직을 앞둔 교사입니다. 십팔 년 육 개월 동안 쉼 없이 너무나 즐겁게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출산휴가 삼 개월 쉬면서도 어서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했고, 주변의 아무도 제가 이렇게 중간에 그만둘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거의 이십년 동안 교직을 천직으로 여겼던 분이 왜 울먹이며 추모 집회의 연단에 서게 되었을까? 나는 라면 물 올려놓은 것도 잠시 잊고 선배 교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선생님은 학교 폭력 업무를 2년 정도 담당했고 관련 학부모와 학생에게 시달리며 몸무게가 십 킬로도 넘게 빠졌다. 그러던 중 한 사건에서 교장 선생님이 변호사를 쓰면 일이 커지니까 가해자 답변 진술서를 선생님에게 직접 작성하라고 했단다. 이후 가해자 부모가 앙심을 품고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로 선생님을 고소했다.     

선생님은 이미 몸이 축나서 병가를 쓴 와중에 고소장을 받았고, 삼 개월 뒤 무혐의를 받을 때까지 각종 증거를 제출하며 법원을 들락거려야 했다. 무혐의를 받고 나서는 아무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아 무고죄로 고소하는 것도 포기했다. 이때 얻은 무력감과 허무함으로 지금도 정신과 약과 불면증 약을 복용 중이고 어지럼증에 시달려서 편두통 예방주사도 주기적으로 맞는다고 했다.     


 “저는 이제 교직을 떠나지만 선생님들이 오늘도 무사히, 그리고 내일도 무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무조건 건강히 지내십시오. 죽지 마십시오.”

     

 죽지 말라는 말이 후배에게 하는 마지막 당부의 말이라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으면서도 후배에 대한 애정이 섞인 당부에 코끝이 뜨거워졌다. 선배님이 이제는 편히 쉬시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한편으로는 ‘내가 선생님의 연차가 되었을 때 그녀처럼 지난날들이 열정적이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지,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교직 생활을 하면 안 되는 걸까?’ 생각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른 사연이 이어졌다. 교과서를 꺼내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했다가 아동학대로 고소당했다고 했다. 담임이 중간에 바뀌면 아이의 정서에 좋지 않으니 올해는 임신하지 말라는 학부모의 요구를 들은 교사도 있었다. 곪았던 상처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순서 없이 터져서 어디서부터 연고를 발라 줘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이었다. 무서웠다. 내게도 언제 비슷한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당장 내년의 나도 안전할 수 없었다. 눈치 없이 라면 물은 요란하게 끓었다.     


  디데이를 계산하며 손꼽아 기다리던 방학식 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큰 사건 사고 없이 한 학기를 보낸 안도와 평화의 날이었다. 남은 에너지를 짜내어 치킨 한 마리라도 시켜놓고 축하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라면 물 끓이다가 오열이라니.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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