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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May 18. 2024

곤드레밥과 명란 계란말이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점심까지는 그런 때다.


미세먼지가 가득해도 비바람이 쳐도 얼굴 찡그리지 않는 때다. 큰맘 먹고 고구마를 한 상자 주문했는데 베란다 구석에 남아있던 고구마를 발견해도 허허 하고 넘길 수 있다. 세탁비 아낀다고 비싼 니트를 손세탁하다가 말아먹어도 이러면서 배우는 거라고 넘어가겠다. 이때 누가 내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면 성공률이 높아질 테니 참고하시라.


특히 오늘은 이른 약속도 없고 날도 화창한 완벽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요즘 야식을 줄여보는 중이라 어젯밤엔 치킨과 초코케이크가 당기는 혀끝을 방울토마토(잔뜩)와 아몬드(잔뜩)로 잠재우는 기적 같은 일을 해냈다. 덕분에 눈 뜨자마자 뭐 먹을까 고민부터 했다.

과일이나 빵 따위로 채워질 허기가 아니었다. 밥이 필요했다. 냉동 곤드레 밥을 사놨던 기억이 났다. 5평짜리 작은 자취방 크기만큼이나 작은 냉장고와 살아가고 있다. 냉동실 문을 열면 자꾸 뭐가 쏟아져서 발을 멀찌감치 딛어야 한다. 터질 것 같은 냉동실 문을 박스테이프로 고정해 놓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드레 밥을 먹고 싶은 날이었다. 토요일 아침의 에너지에 기대어 나는 겁도 없이 냉동실 문을 열어젖혔다. 냉동밥, 감자빵, 냉동 주꾸미볶음, 얼린 대파 등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냉동 곤드레 밥은 하필 저 맨 뒤에 박혀 화석처럼 있었다.

배가 엄청 고팠지만 지금 냉동실 정리를 안 하면 몇 달을 또 스릴 넘치게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쑥인절미 시킬 때 같이 온 콩고물, 새까맣게 익어버려서 얼려놓은 바나나, 어디선가 남아서 챙겨온 얼음컵 등이 눈에 띄었다. 몇 달을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으니 버려도 되겠다 싶은 것들이었다.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냉동 명란을 발견하고 어디서 공짜로 얻은 것처럼 기뻤다. 몇 달 전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효리 언니가 명란 계란말이를 만드는 걸 보고 사둔 것이었다. 곤드레 밥에 명란 계란말이를 같이 먹으면 얼마나 황홀할까 싶었다.


  침대에 누워 명란 계란말이 레시피를 찾아봤다. 오랜만에 효리 언니 근황도 살펴주었다. 어머니랑 같이 예능을 찍었다고 한다. 태어난 김에 세계 일주 이후에 예능 볼 게 없었는데 기대가 됐다.


'삑! 삑! 삑!(야 이놈아 너 냉장고 정리 중이야!)'

냉장고가 정리 더 안 할 거면 문 좀 닫으라고 성을 내서 정신을 차렸다. 이번엔 냉장실을 뒤지며 먹다만 크림치즈가 딱딱하게 굳어있는 걸 발견했다. 귀한 크림치즈를 바닥까지 긁어먹지 못하고 버리다니! 내가 심각하게 분주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결국 두 시간 만에 점심을 먹었다. 이 정도 시간이면 육첩 반상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곤드레 밥에 명란 계란말이, 백김치만 놓고 먹었다. 내겐 충분했다. 들기름을 살짝 두른 곤드레 밥과 짭조름한 명란이 터지는 계란말이는 별것 아닌데 별 맛이 났다. 귀한 토요일 아침에 어울리는 근사한 한 끼였다. 만족스럽게 배를 통통 두드렸다.


냉동 곤드레 밥 꺼내다가, 냉동실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가, 분리수거함을 뒤지다가, 명란을 발견하고 효리 언니 근황을 찾아보다가 밥을 차려 먹고 치웠다.

​​


완전한 자유 시간에 나를 혼자 풀어두었더니 이렇게도 두서가 없다. 의식의 흐름대로 떠오르는 일을 한다. 뭘 하는지 몰라도 분주하다. 새삼 이런 인간이 스무 명이 넘는 애들을 데리고 하루를, 일 년을 어떻게 지내나 싶다. 참으로 기특하고 또 기특하다.


점심 차려 먹는 게 두 시간 걸리는 내가 매일 아침 출근도 하고 수업도 하고 싸우는 아이들도 화해시키고 학부모 상담 전화도 받는다. 퇴근 후엔 운동도 다니고 빨래도 하고 청소기도 돌린다. 또 월세도 내고 세금도 내고 운전도 한다.  어떻게 또 살아진다.


짜식. 허둥지둥 비틀비틀해도 어쨌든 어른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곤드레 밥이랑 명란 계란말이도 해먹이며 나를 대접해준다. 그래 이 으른 짜슥아. 알겠으니 이제 점심 차린다고 난리 난 부엌을 좀 치워보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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