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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May 25. 2024

이 구역의 축구왕은 나야 나!


  작년 봄이었다. 그가 내 마음에 훅 들어온 건. 시원시원하고 당찬 모습이 눈에 띄었다. 주변에 물어도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동경하는 대상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내 모습은 꼭 스무 살 새내기 같았다. 그와 가까워지려는 여자들이 요즘 부쩍 많아진 걸 느낀다. 나도 그녀들 중 하나일 뿐이겠지만 상관 없었다. 그중 하나라도 되고 싶었다.

  용기 내어 처음 그의 주변에 자꾸 얼쩡거려봤다. 넘치는 매력과 에너지 때문에 자꾸 주춤거렸다. 저질체력에다 소심한 집순이인 내가… 당신과 어울릴까?

  처음 풋살에 마음을 뺏긴 건 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라는 책을 만났을 때였다. 도서관에서 ‘여자 축구’라는 단어에 이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축구가 저렇게까지 아름다울 노릇인가 어이없을 정도였다. 우아한 헛다리와 그물 안으로 감겨들어가는 공의 궤적과 관중들의 얼굴에 역력한 감동의 흔적. 어마어마한 규모의 관중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지만 세상이 잠시 숨을 죽인 것 같은 시간이었다.’

  도대체 취미로 하는 축구란 어떤 경험이길래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걸까? 책은 내가 펼쳐보았지만 혼비 작가님이 나를 글 솜씨로 현혹시켜서 잡아 앉혔다고 할 수 있다. 활기 넘치는 분위기 뒤에 흐르는 적당한 긴장감, 근사하게 그을린 피부와 탄탄한 종아리, 질끈 묶어 올린 머리와 이마 옆쪽으로 흐르는 땀방울. 어디서 주워 본듯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며 면치기하듯 후루룩 책을 읽어 내렸다.

  그녀의 글 솜씨에 홀려 나는 바로 집 근처 여자 축구 동호회를 알아봤다. 그렇지만 여자 축구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가 식지 않았던 때라 몇 달 후에나 코트를 밟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람티님 맞으시죠? 반갑습니다. 저는 홀란드, 여기는 메시, 저기는 호날두에요. 활동 닉네임 뭘로 하실래요?’

"저는... 이을용?"

"푸하하!! 을용타! 강렬하네요. 그럼 지금부터 을용님아라고 부를게요 그럼."

  긴장한 와중에 떠오르는 아무 선수 이름 중에 얻어걸린 닉네임이었다. 매너 없는 상대 선수의 뒷통수를 후려갈긴 이을용 선수처럼 나도 언젠가 축구공 뒷통수를 갈겨버리겠다는 깊은 뜻! 은 전혀 없었다.그냥 떠오르는 이름이 왜 이을용이었던 건지 지금도 미스테리다.


​ 닉네임이 ​​이게 맞나 고민할 틈도 없이 신선한 장면들을 목격했다. 두 시간 내내 서로 응원하고 찬스를 놓쳤을 땐 세상이 끝난 듯 소리지르며 안타까워했다. 누군가는 이게 뭐라고 저렇게 용가리처럼 불을 뿜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내겐 그 불길이 근사해보였다.

  머리카락을 질끈 묵은 화장기 없는 얼굴들이지만 생기가 넘쳤다. 축구 기술보다 에너지 넘치는 분위기에 먼저 적응해야 할 것 같았다. 그곳에선 어설프게 점잖떠는게 더 촌스러울 것 같았다. 바로 내 얘기였다.

 흡사 알몸을 내놓고도 깔깔거리는 여자 목욕탕의 활기 속에서 나는 아직 어설프게 수건을 걸치고 두리번거리는 뜨내기 같았다.

   ‘그래 내가 무슨 풋살이야. 혼자 조용히 산책이나 하자.’ 마음이 왔다갔다해서 연습에 나가다 말다를 반복했다. 꾸준히 안하니까 자꾸 기초 패스 연습만 반복하게 됐다.

  수영으로 치면 자꾸 초급반만 등록하면서 자유형도 제대로 못하는 꼴이었다. (실제로 나는 수영 초보반만 4번 도전했지만 아직 물에 뜨지도 못한다…)

  이렇게 또 하나의 운동을 떠나보내는가 싶었다. 그런데 올해 우리 학교에 교사 풋살 동호회가 생겼다. 이번에 다른 학교에서 전입 온 선생님들 중에 축구 인재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었다. 평소에 학교 내에서 친목 생활보단 집에가서 혼자 쉬는 걸 좋아하지만 이번엔 1초의 고민도 없이 가입했다.

  인사만 겨우하던 직장 동료들과 하는 팀운동이 어색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은 2주 만에 사라졌다. 뭐든 열심히 하고 보는 선생님들의 특성상 축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깔깔거리며 뛰어다녔다. 나같은 왕초보들이 대부분이라 서로의 모습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터치라인도 없는 막무가내 축구였다.

  축구동아리 회장 출신인 신규 선생님부터 연차가 두둑한 왕초보 부장 선생님까지 남녀노소(?)가 섞여 발길질을 하는 모습이란 어딘가 통쾌한 구석이 있었다. 공 앞에선 연차고 뭐고 나이고 뭐고 잊게 됐다. 그저 분홍조끼팀, 노란 조끼팀의 일원이었다.


  방과후 학교를 마치고 늦게 하교하던 몇몇의 아이들이 체육관 옆을 지나가다가 문틈에 붙어 우리의 놀이를 구경했다. 선생님들이 공 하나 두고 꽤나 씩씩거리고 있으니 신기할 법도 했다.


  그런데 어쩌다 내가 지금까지 두 골을 넣어 득점 왕이 되어버렸다. 노련한 경력자들이 다 떠먹여 준 골이었지만 어쨌든 숟가락을 잘 얹을 만큼은 됐던 모양이다. 패스 연습이라도 오지게 반복했던 지난날의 나에게 박수!

  얻어걸린 골에 신이 난 나는 헬스장에 가서도 인사이드킥 연습을 했다. 얼마 전에 시작한 피티 선생님이 전직 축구선수였던 건 내게 이 구역의 축구왕이 되라는 신의 뜻인지도 모른다. 툭! 툭! 툭 헬스장 벽에 대고 패스 연습을 하며 근력 운동을 마무리한다. 이 정도면 자유형의 문턱은 넘기지 못했지만 골문은 넘겨 보겠다는 당찬 희망을 품어볼 법 하지 않은가.

  공 앞에서 나는 삐그덕거리는 로보트 같다. 다 만들어서 주는 골찬스를 대부분 날려버린다. 그렇지만 못해도 잘 하고 싶은게 생겨서 설렌다. 학교 안에 공차기 친구들이 생긴 것도 기쁘다. 운동복을 입고 축구화를 챙겨 나서는 수요일 출근 길의 발걸음이 가벼워진게 어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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