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3일 토요일. 대구에서 식사가 제일 잘 나온다는 대구 비엔나 예식장에서 두 살 터울 남동생이 결혼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4인 가족에서 태어난 K-장녀로서 비혼을 다짐한 내가 남동생이 결혼하는 날에 겪은 설움과 책임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 가족은 경기도에 살고 있지만, 올케가 대구에서 나고 자라 대구에서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 엄마 아빠 결혼식도 대구에서 했는데, 아빠 고향이 경상도라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약 아빠 고향이 다른 지역이었다면 동생 결혼식이 대구에서 열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여전히 마음 한편에 자리한다.
당시 나는 경제지 기자로 일하고 있었고, 결혼식 당일 오전까지 마감해야 할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새벽 6시에 기사를 완성하고 한숨도 못 잔 채 바로 씻고 며칠 전 백화점에서 어렵게 구한 라인 없는 여성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키가 커 보이는 하이힐 대신 평소에도 신을 수 있게 장만한 편하기로 소문난 락포트 로퍼도 신었다. “우리 딸이 결혼식날 꼭 이런 깔끔한 코트를 입었으면 좋겠어! 엄마 소원!”이래서 산 검은색 코트까지 챙겨 입었다. 백화점에서 긁은 카드값을 3개월 동안 나눠 갚아야 했다. 일주일 전 단정하게 자른 머리는 흔히 말하는 여자 숏컷이었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30분 만에 준비하고 대구로 향하는 대절버스 집합 장소로 향했다. 부모님은 하루 전날 대구에 내려간 터라 내가 대절버스의 운영을 책임지게 됐다. 수도권에 사는 일가친척들, 아빠 친구, 엄마 친구, 동생 친구들이 모두 지하철역 앞에 모여 한 버스를 타고 대구 비엔나 예식장에 무사히 도착해야 한다는 미션. 초콜릿, 견과류, 사탕을 한 땀 한 땀 포장해 준비한 간식 봉지를 챙기고 미리 주문한 김밥을 차에 실었다.
“우리 동생 결혼식 가는 먼 길 잘 부탁드려요.” 10만 원이 담긴 팁 봉투를 기사 손에 쥐어주며 너무 입꼬리를 많이 올려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일까지 모두 내 몫이었다. 버스에 타서는 간식, 김밥, 물, 술, 안주를 그룹별로 나눠주며 “엄마랑 어쩜 그리 똑같이 생겼냐”는 말을 5432번 정도 들었다. 배식을 마시고 내 몫의 김밥을 열었다. 젠장 햄 없잖아! 대충 때려먹고 잤다.
한 숨 자고 일어나니 비엔나 예식장에 도착했다. 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돈 식구에게 인사하고 평소 하지 않던 짙은 화장을 한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체크해줬다. 올케를 처음 보는 친척들에게 서로를 소개하는 역할은 물론이다. 그 사이에서 어색하지 않게 농담하며 크게 웃는 일도 내 몫이었다. 축의금 내는 곳 앞에서 모부님과 손님들을 맞이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축의금 얘기를 하자면, 나는 결혼식 한 달 전 1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동생 통장에 송금했다. “동생이 결혼하는 데 누나 체면이 있지, 100만 원은 해야지.” “동생이 아니라 가족 될 사람한테 하는 거라고 생각해.” 당시 나는 일을 다시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었고, 나를 위해 100만 원짜리 물건을 사본 적도 없었다. 나는 결혼은 하지도 않을 건데 돌려받지도 못할 100만 원을 누나라서 쓰게 됐다는 슬픈 이야기.
100만 원이 아까워서 인지 결혼식이 시작하려는 순간에도 나는 축의금 내는 곳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 신랑 입장을 준비하는 동생을 마주치게 됐다. 사실 우리는 그리 친하지 않다. 사춘기 시절에는 몇 년간 말을 안 한적도 있지만, 지금은 필수 대화만 나누는 보통의 남매 관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목이 마르다는 동생. 나는 어떻게든 신랑 입장 순서 전에 동생에게 물을 먹이고 싶었다. 왜지? 평소 같았으면 목말라 뒤지든 말든 신경 안 썼을 텐데 이날 따라 왠지 챙겨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정수기를 찾아 물을 떠다 입에 넣어주기까지 했다. 동생이 장갑을 끼고 있었나? 왜 그렇게까지 했었는지 모르겠네.
엄마들이 화촉을 밝히면서 결혼식이 시작됐고, 아빠들의 순서가 왔다. 요즘 결혼식은 신부 아버지가 성혼 선언문을 낭독하고, 신랑 아버지가 직접 쓴 편지를 읽는 모양이더라고. 결혼식 몇 주 전부터 편지를 써야 한다길래, 내가 도와주려고는 했다. 아빠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적은 초고를 쓰면 내가 단어나 문정을 덧붙여 글을 완성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초고는 웬걸 아빠는 처음부터 나보고 쓰란다. 안 써주면 자기가 즉흥으로 생각나는 대로 말하겠다는 거야. 대체 내가 아빠의 마음을 어떻게 알고 평지를 창작해 낸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신경을 안 쓰려고 했지만 결혼식 이틀 전, 아무래도 안 되겠더라. 아빠가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 말을 많이 해본 사람도 아니고, 물려받은 유전자를 보아하니 발표 체질도 아니다. 원고가 없으면 분명히 떨며 어버버하고 가족, 행복, 사랑, 건강만 염불을 외다 내려오는 장면이 눈앞에 선했다. 평상시에 했던 말을 또 하는 버릇을 가진 아빠니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비난의 화살은 누구에게 돌아갈까. 그건 바로 나. 기자씩이나 한다는 큰딸이 아무런 준비 없이 아빠를 올려보내?
결국 나는 ‘사랑하는 내 아들아’로 시작해 ‘꽃길만 걷거라’로 끝나는 편지를 썼고, 아빠는 한 번도 절지 않고 잘 읽어냈다. 사실 내가 욕먹을까 걱정되기보다 아빠가 창피해할까 봐 편지를 적어 내려갔다. 그날따라 기분이 좋기도 했고. 나는 결혼을 안 할 건데 어쩌면 한 번 있는 자식 결혼식(동생이 여러 번 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에 가족과 친구들을 다 불러 놓고 창피당하면 아빠 인생의 흑역사로 남을까 봐 그랬다. 내가 쓴 편지를 읽는 아빠를 보고 사촌언니는 감동받아 울뻔했단다. 편지 대필 작전은 성공적이었지만 결과가 좋았다고 해서 내가 아빠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요즘은 대부분 생략한다는 폐백도 했다. 예물, 예단 등 허례허식은 차리지 않겠다면서 폐백까지 하다니. 대구 폐백실은 서울 예식장 폐백실보다 2배는 크단다. 물론 예물과 예단도 했다. 3달 전 여름이었다. 예물은 아빠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살마이 한다는 종로 귀금속 상가의 한 가게에서 했는데, 가족들 중 유일하게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직장을 다니고 있어 서울 지리에 밝다는 이유로 내가 가이드를 맡았다. 우리 다섯 명(엄마, 아빠, 나, 동생, 올케)은 내가 예약해둔 식당에서 파스타를 점심으로 먹고 백화점에 들러 동생 예복도 사고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결혼 생활 30년 동안 아무도 나한테 금팔찌를 안 사주네, 누가 사줄 사람 없나?” 새 식구에게 큰 선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넋두리 하는 엄마에게 ‘내가 금팔찌를 사주겠노라’ 말하지 않았다.
폐백이 끝나고 밥을 먹고 있는데, 서울로 올라가는 대절버스가 출발해야 한단다. 원래대로라면 타고 온 버스를 그대로 타고 가 멀리서 한 결혼식에 와준 하객들을 극진히 모실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결혼식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 사촌 언니에게 대절 버스를 맡기고 나는 대구에 남았다.
정산이 남아있었다. 지금도 정산을 어떻게 했는지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내 백팩에 담긴 돈 봉투를 하나하나 꺼내 돈 세는 기계에 넣고 식대를 지불했다. 챙겨간 클렌징 티슈로 엄마와 아빠 화장을 지워줬다. 엄마 옆에 서서 한 겹씩 벗겨지는 한복을 상자에 담았고 인조 속눈썹도 직접 떼어줬다. 사돈댁과 서로 고생했다며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차에 탔다. 그렇게 결혼식은 끝났다.
남동생 장가보내던 날 나는 왜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결혼식에 헌신했을까? 성인이 된 후로 장녀인 내게 가족들이 바라는 역할들을 무시하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나였다. 가족 행사고 가족이라면 누가나 이렇게 도와준다고? 희생이 아니라 도움이라고? 아니. 만약 나 결혼식을 했다면 내 남동생은 이렇게까지 많은 일을 책임감을 느끼며 하지 않았을 거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큰형, 큰오빠였어도 동생 결혼식에 이렇게까지 관여하지는 않았으리라.
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니? 어쩌면 뿌듯함을 느꼈던 것 같다. 동생의 결혼식이 무난하게 흘러갔으면, 우리 가족 행사에 온 손님들이 불편해하지 않고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안 했어도 됐다. 내가 종로까지 따라가지 않았어도 그들은 올케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잘 선물했을 거다. 내 축의금 100만 원이 없었어도 결혼을 준비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 정리된 글로 쓰인 편지가 아니면 또 어떤가.
내 남동생이 가족에게 헌신하는 만큼만 하자고, 보통의 평범한 아들들이 하는 것처럼만 모부님에게 잘하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나는 또 설움을 느끼면서도 책임을 다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