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호 집들이
우리집은 1990년대 지어진 다세대 빌라다. 나무 창틀과 방문, 체리색 몰딩, 옥색 싱크대, 청록색 화장실 타일 등을 주요 특징으로 꼽을 수 있겠다. 집의 첫인상을 좌우하던 옥색 싱크대는 흰색으로 바뀌었고 나머지는 그대로다. 날이 좋아 창문을 열라치면 손에는 나뭇가루가 묻어 나오고 아귀가 안 맞는 알루미늄 샷시는 현관문을 열 때마다 창문을 덜컹거리게 해 집안 전체가 소란스럽다.
낡은 집이지만 나름의 운치가 있다. 건물 뒤에 바로 산이 있어 공기가 맑고 지대가 높아 창문 밖으로 시야가 탁 트여 하늘이 훤히 보인다.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창문을 열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여기가 캠핑장이고 피그닉이다. 가끔 바퀴벌레와 돈벌레가 출몰하지만 세달에 한번 전문 방역 업체에서 소독해주고 있으니 걱정을 덜었고, 좋아하는 핸드솝으로 손을 씻을 때나, 스머지 스틱을 태울 때면 내 취향으로 온 집안을 가득 채울 수 있다. 튼튼하게 지어진 덕에 층간 소음도 없다.
우리집은 201호와 202호다. 명확한 구분 선을 그어보자면 201호에는 엄마 아빠가 살고 202호에는 내가 산다. 201호가 본사, 202호는 직영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사에서 직접 관리하는 직영점은 항상 엄마의 손길이 느껴진다. 직영점 총괄 매니저였던 사촌언니가 퇴사하고 나자, 알바생 신분이었던 내가 승진을 하게 됐다. 202호 세대주로서 혼자 모든 공간을 차지하게 됐다.
가여운 20대의 나는 202호 작은방에 머물러야 했다. 도저히 침대가 들어갈 만한 크기가 안 됐다. 침대를 잃은 자의 설움을 아시나요? 책상도 작은 걸로 바꿔 크기가 대폭줄어 들었는데도 너무 좁았다. 보통 이불 크기도 너무 커서 맞춤 이불을 맞춰 작은 공간에 욱여넣어야 했다.
내 방을 201호에서 202호로 옮기던 날을 기억한다. 작아진 책상과 행거에 걸 몇 가지 옷만 옮기면 돼서 아빠랑 둘이서 단출하게 이사를 했다. 이사한 날이랍시고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짬뽕 그리고 탕수육을 시켜 먹었는데, 차마 못 먹겠더라. 침대도 들어가지지 않는 저 작은 방에서 살아야 하는 게 서러웠다. 엄마와 아빠는 나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자기 공간이 없던 아들에게 자기만의 공간을 내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202호를 오롯이 혼자 차지하게 되고 난 후 가장 먼저 침대를 샀다. 웅크리고 자던 지난 10년을 보상해주고 싶었다. 침대에 한이 맺혔거든. 자취생들이 많이 쓴다는 저렴한 매트리스부터 침대 하면 떠오르는 브랜드의 매트리스까지 백화점, 대리점을 찾아가 누워보고 견적을 받았다. 누웠을 때 가장 편했던 산후조리원과 호텔에 납품 한다는 퀸사이즈 침대를 5개월 할부로 긁었다. 생에 처음 해보는 사치였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그냥 저렴한 침대 사고, 나중에 시집갈 때 비싼 거 사”
내 지금 일상을 결혼하기 전 혼자 머무는 일시적인 상태로 인식하고 있는 아빠의 말이 큰 결심을 하게 해줬다. 침대 매장에서 두 배가 넘게 차이 나는 두 침대를 사이에 두고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아빠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 다른 브랜드에서는 비싼 침대를 사면 결혼할 때 혼수로 들고 가도 된다는 말로 구매를 촉진했지만, 그 말 때문에 그 브랜드가 싫어졌다. 안 삽니다. 안 사.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가 혼자 비싸고 큰 침대 쓰면 안되나?
엄마는 나를 이불 가게에 데리고 가 내 취향대로 이불을 고를 수 있게 해줬다. 사이즈는 따로 줄자로 잴 필요 없이 ‘퀸’사이즈로 달라고 말했다. 한 달을 기다려 드디어 침대가 202호에 안착했다. 아, 너무 크고 높아. 그래서 좋아. 연못에 사는 고래처럼 왠지 안 어울리는 조합이지만, 나에게 웅크리고 자던 지난 10년을 보상해주었다.
침대 대각선에는 작은방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했던 책상을 뒀다. 공부를 하지는 않지만 수험생 책상처럼 장비빨을 세웠다. 그림자가 지지 않는 넓은 스탠드 조명,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쓴다는 의자, 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는 발 받침대, 거북목을 방지해주는 노트북 거치대 등을 구비했다. 여기서 책도 보고 글도 쓰고 온라인 모임도 한다. 재택근무를 할 때도 요긴하게 쓰인다.
내가 10년을 머문 작은 공간은 옷방이 됐다. 201호에 보관하던 부피가 큰 옷들도 가지고 왔다. 3단 원목 서랍도 하나 들였다. 201호에 있던 책장도 작은방으로 가지고 왔다. 오롯이 내 짐이라고 할 수 있는 물건들을 모아 둔 공간. 방을 여러 개 쓰니 출근 준비 동선이 전보다 많이 길어졌지만, 아침마다 입을 옷을 가지러 201호로 가지 않아도 돼서 오히려 시간은 많이 줄었다.
거실에는 아주 작은 냉장고와 커피포트, 전자렌인지만 뒀다. 가스레인지는 있지만, 냄비와 프라이팬은 없어요. 그릇도 거의 없고 컵만 잔뜩 있다. 음식을 안 해 먹으니 식탁도 필요 없지. 가끔 자극적인 음식이 땡길 때면 초등학교 친구들이 집들이 선물로 사준 비싸고 하얀 전자렌인지에 떡볶이를 해 먹는다.
201호에 있는 나의 짐을 모두 가지고 왔는데도 공간이 남는다. 인생에서 처음 나만의 자투리 공간이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