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믿고 싶었지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힘없는 목소리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이런저런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시작하다 슬슬 시동을 걸었다.
“엄마, 나 방학 때 한국에 갈까?”
“응? 왜?”
“엄마도 요즘 너무 힘이 없는 것 같고, 걱정도 되고. 엄마도 보고 싶어서.”
“엄마도 니가 보고 싶긴 한데... 비행기표 비싸지 않나?”
“비싸도 가는 거지, 뭐.”
“음... 엄마가 요즘에 상황이 좀 안 좋아서... 다음 방학은 언제지?”
“다음 방학은 7월이지. 왜, 무슨 일 있나?”
“아니, 무슨 일은 아니고... 오면 돈도 많이 쓰니까...”
“왜, 엄마 보러 가지 말고 그 돈 아껴서 엄마 줄까?”
“니 돈 있나?”
“아니, 없지.”
“근데 어떻게 오노... 비행기 값 얼마 정도 하는데?”
“둘이 가면 300만 원은 하겠지.”
엄마는 뭔가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엄마가... 요즘 좀 그래가지고... 이번에는 그냥 오지 말고 7월에 온나.”
“왜? 무슨 일인데?”
“아니 그냥... 엄마가 요즘 좀 힘드네. 상황도 안 좋고... 너희 오면 또 챙겨줘야 하니까...”
“엄마, 내가 화 안 낼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봐. 엄마 그때 투자하다가 생긴 빚이 얼마야?”
“좀 많다...”
“그니까 정확히 얼마냐고. 엄마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잖아. 내가 얼만지 알아야 같이 방법을 찾아보든지 하지.”
“니가 무슨 돈이 있노...”
“내가 돈이 없어도 정확히 상황을 알아야 방법을 찾지.”
“.......”
“내가 일단 한국에 갈게, 엄마. 가서 같이 생각을 해보자.”
“아니야... 일단 이번에는 오지 말고... 7월에 온나. 모르지, 7월에는 상황이 좀 나아질지도...”
“7월에 상황이 어떻게 나아지는데? 엄마 아직도 투자 하나?????”
엄마는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그런 거 다시는 안 한다며, 절대 아니라고,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참으려고 했지만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엄마를 어떻게 믿냐며, 엄마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걸 나를 걸고 말할 수 있냐고, 정말로 그때 이후로 투자를 안 했냐고, 지금도 안 하고 있냐고 물었다. 엄마는 나를 왜 거냐며, 무슨 소리 하냐며 대답을 회피했다. 집요하게 ‘딸을 걸고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냐’고 묻는 내게 엄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엄마의 말에 흔들렸다. 아무리 투자에 미쳤어도 엄마가 나를 걸고 거짓말을 할까? 내가 알게 된 이후로는 정말로 하지 않았고, 그전에 생긴 빚을 갚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남은 빚이 얼만데, 말해 봐 봐. 진짜로 화 안 낼게.”
“....... 천만 원.”
“천만 원이라고?”
“응.”
“진짜 천만 원 밖에 없나?”
“아, 진짜다.”
“그게 다 카드빚이야?”
“....... 아니. 햇살론.”
“햇살론? 그게 뭔데? 엄마 카드빚도 남았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빌려준 돈 못 갚는다며.”
“아... 그렇지...”
“그럼 햇살론 천만 원에 카드빚은 얼만데?”
“..... 300만 원.”
“그거 말고는 또 없나?”
“아이, 없다!”
“그럼 천삼백만 원이 전부라고?”
“어.”
“진짜?”
“어!”
생각보다 적은 액수에 긴가민가했다. 아닌데, 아빠는 분명히 1억이 넘는다고 했다. 그런데 아빠도 정확한 금액은 몰랐다. 아빠가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 건가? 사실은 천삼백만 원이 엄마 빚의 전부인 건 아닐까? 갑자기 마음의 짐이 10분의 1로 줄어든 것 같았다. 엄마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들이 모두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었다. 그건... 아껴둔 퇴직금에 조금 더 보태면 지금 당장이라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건... 독일에서의 1년 치 생활비였지만, 그래도 엄마를, 우리 모두를 구할 수 있었다.
몇 번을 묻고 또 물어도 엄마는 계속 같은 대답을 했다. 화내지 않는다고, 괜찮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 더 큰 금액이어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해도 그게 전부라고 했다.
엄마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행을 없애버리고 싶었으니까. 그냥,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되는 일이었구나, 괜한 걱정 했잖아? 우리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난리 쳤네. 하하하. 이래서 팩트 체크가 중요하다니까.
갑자기 엄마가 속삭였다. 아빠가 집에 돌아왔다고 했다.
“아빠한텐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전화를 끊었다. 아빠는 이미 엄마의 빚에 대해 다 알고 있는데, 왜 아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걸까? 또다시 기묘한 불안이 피어올랐다.
다시 한번 사실 확인을 해야 했다. 우리가 아는 정보를 모두 공유하기 위해 아빠와 언니, 나는 엄마가 없는 단체 대화방을 만들고 그룹 통화 기능으로 한데 모였다. 아빠는 엄마에게 잠깐 나온다고 둘러대고 차 안에서 통화를 했다. 이 와중에 우리는 비밀 결사단이냐며 킥킥킥 웃었다.
“엄마가 빚이 1300만 원이라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아빠의 말에 의하면, 엄마가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몇 달이 지난 뒤, 이모에게 보내려던 문자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빚이 1억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엄마 명의로 된 집의 등기부등본을 떼 보았고 그해 3월에 부동산 담보 대출을 받아 잡혀있는 총 6500만 원의 채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는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그 이후로 잠잠한 줄 알았지만 아빠에게 비밀을 들킨 뒤, 엄마는 아빠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카드 결제일이 다가오자 신용불량자가 되면 더 이상 일도 못 하고 죽을 거라며 싹싹 빌어서 돈을 받아냈다. 아빠는 500만 원의 카드 대금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비슷한 금액의 카드대금은 매달 돌아왔고, 엄마는 카드 결제일이 돌아올 때마다 아빠를 들들 볶았다. 사람들에게 알리면, 언니한테 알리면 죽을 거라고 협박하면서.
“근데 엄마가 투자는 이제 더 안 한다던데? 예전에 하던 빚이 계속 그렇게 많은 거야?”
“무슨 소리 하노. 어제도 내한테 핸드폰 보여주면서 이제 감을 잡았다고, 매달 오백만 원씩 갖다 줄 테니까 자기만 믿으라고 하던데.”
결국 엄마가 나에게 한 모든 말은 거짓말이었다. 빚이 1300만 원이라는 것도, 더 이상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빠는 며칠 전에도 이게 아니면 절대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엄마의 말을 이기지 못하고 아빠 명의의 카드 대출을 800만 원 늘렸다고 했다.
아빠가 엄마의 정확한 빚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아빠가 엄마를 막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의 빚을 늘려서 엄마에게 돈을 줬다는 건, 아빠가 혼자서 이 상황을 해결할 힘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엄마는 지금도 투자를 빙자한 도박을 하고 있었고, 하루라도 빨리 더 이상의 빚이 늘어나는 걸 막아야 했다. 폭주하는 엄마를 막아야 했다.
언니는 비행기 표를 살 돈도 없고, 일을 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일단 한국에 갈게.”
나를 걸고 거짓말을 하는 엄마를 구해야 했다. 언니를 감당하며 살아온 아빠를, 다시 내가 구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