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가로등 불빛이 지나가고 난 뒤, 오른쪽으로 계속 회전하는 감각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반포 IC였다. 달팽이집에 들어간 것 같은, 나선형의 길 위에서 조금 어지러움을 느끼는 그 순간은 이제 서울에 도착했다는 의미였다.
히터의 온기로 가득 찬 무거운 공기를 벗어나 차가운 서울의 숨을 들이켰다. 기사님의 도움을 받아 캐리어를 꺼내 세웠다. 왔구나. 일 년에도 몇 번을 오가던 이곳에 다시 왔네. 셀 수 없이 떠나온 우리 집을 또다시, 정말로 떠났네.
성신여대입구로, 신논현으로, 가좌로, 마포구청으로, 합정으로 가곤 하던 내 발의 이번 목적지는 숙대입구였다. 이제는 집이 없는 서울에서, 나는 게스트하우스로 가야 했다. 다른 숙소에서 홀로 지내던 남편은 그날 오후, 우리가 당분간 같이 지낼 그곳에 미리 가 있었다. 고속터미널에서 멀지 않았기에 마중을 오겠다는 그를 만류하고 혼자 9호선을 타러 갔다.
지하철 어플에서 확인했던 18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숙대입구역에 도착했을 때는 출발한 시간으로부터 대략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서울 지하철역에서 내 몸만 한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무리였다. 길고 긴 환승 구간을 지나고, 엘리베이터를 찾아 한 층을 오른 뒤 다시 내려 개찰구를 통과하고 또 다른 엘리베이터를 찾아나서는 일은 맨 몸으로 다닐 때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그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2주 만에 만나는 남편이었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지만 마주하기 두려운 순간을 마주한, 뒤섞인 감정으로 그를 안았다.
“고생했어.”
다정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나를 안는 그의 품에서 안도했다. 내가 너에게 돌아왔다. 내가 우리 가족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 손으로 내 짐을 받아 들어 끌고,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았다. 이 손을 계속 잡을 수 있을까,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놓치고 싶지 않아서 손에 힘을 주고 걸었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서 한 유리문 앞에 도착했다. 남편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우리가 묵는 방은 2층이었고,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그가 낑낑대며 캐리어를 올리고 나는 도와줄 방법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면서 뒤따라 올라갔다. 힘겹게 캐리어를 내려놓은 그가 말했다.
“이걸 대체 너 혼자서 어떻게 들고 왔어?”
“죽을 뻔했지...”
멋쩍게 웃는 나를 황당하다는 듯이 보고는 복도를 건너가는 그를 따라갔다. 게스트하우스는 여관을 개조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이전에 고시원이나 원룸 건물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다세대 주택에 사용하는 철제 현관문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이 나왔다. 둘이 잘 수 있는 침대와 옷장, 좌식 테이블로 가득 찬 작은 방이었다. 발 디딜 곳은 적었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둘이 지내기에 나쁘지 않아 보였다.
“배고프지? 뭐 먹으러 갈까?”
짐을 내려놓고 가벼운 몸으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우리에겐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남았다. 앞으로의 우리에 대해, 우리의 삶에 대해 결정해야 했다. 당장 알고 싶다가도 한참을 미루고 싶은 그 이야기를 해야 했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끼니를 해결하면서 조금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을 찾다 한 호프집을 발견했다. 새벽 네 시까지 영업하는 곳이었다. 대학가의 호프집에 들어오니 잊고 있었던 익숙함이 찾아왔다. 독일에서도,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식 호프집. 시답잖은 이야기로 수많은 밤을 지새우던, 오뎅탕과 골뱅이 소면과 계란말이가 있는, 맥주 3000cc와 참이슬 후레시가 있는 곳. 우리 둘이, 또 선후배 동기들과 셀 수 없는 시간을 보낸 곳.
소주를 싫어하면서도 꾸역꾸역 먹던 그때가 떠올라 맥주 두 잔과 참이슬 한 병, 그리고 골뱅이소면과 마른오징어구이를 주문했다. 작고 투명한 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잔을 부딪쳤다.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는 달기는커녕 너무 썼다. 이렇게 쓴 걸 학교 다닐 때는 잘도 꿀떡꿀떡 마셨구나. 오랜 기억 속에 남아있었던 독한 알코올 향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어머님은 어떤 상태이시고, 자기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집에 있는 동안에도 종종 연락하며 상황을 전달했지만 아주 상세하게는 아니었다. 그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고, 시시콜콜 나의 짐을 전가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차근히 그에게 들려주었다. 찾아낸 빚들과 병원, 도박중독치유센터에 다녀온 것, 경찰서에서 사기행위를 신고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 그리고 방금 전에 엄마와의 사이에 벌어졌던, 너무 힘들었던 시간들. 그리고 내가 부담할 재정적인 면은 언니와 함께 나눌 엄마의 병원비 정도라는 것. 나는 독일로 다시 돌아가서 내 삶을 살 거라는 것.
그는 내 말을 가만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사실 얼마 전에 이미 생각을 끝냈어. 그래도 우리가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기다렸어. 내가 혼자 서울에 있으면서 느낀 건, 혼자 있다고 더 편안하거나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거였어. 이전에 하던 일을 하면서 비슷하게 지내고 싶지도 않아.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건, 너도 그걸 원한다면 독일에서 같이 지내고 싶어. 그런데 나도 이젠 너 때문에 독일에 갔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 선택으로 여기기로 했어. 이번엔 정말로 내가 그렇게 결정한 거니까.
그런데 한 가지 확실히 하고 싶은 게 있어. 사실 너가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어머니한테 돈을 준 건, 나에게 좀 충격이었어. 나는 너를 믿고 너에게 돈 관리를 모두 일임했는데, 돈 문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너가 나한테 그런 일을 숨긴 건... 그 얘기를 듣고 너에 대한 신뢰가 좀 깨졌어. 너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내가 금방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랬지만, 그래도 그러면 안 됐어. 엄마한테 준 돈은 자기가 벌었던 돈이 아니라 내 퇴직금에서 남은 금액이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내 나름대로는 엄마가 달라고 했던 돈 전액이 아니라 내가 가용할 수 있는 돈만 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그 돈이 내 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였지. 그렇게 딱 나눌 수 없는 거였어. 그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나도 이번에 정말 크게 깨달았어. 자기와 상의하지 않거나, 어쨌든 몰래 무슨 일이든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괜히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숨기는 일이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엄마아빠와 나 사이에서든 자기와 나 사이에서든 그랬던 일이 결국 모두 문제가 되었다는 걸 알았어. 자기가 나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도 이해해.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정말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해. 나를 믿지 못하겠으면 돈 관리를 자기가 해도 괜찮아.”
“그러고 싶다는 건 아닌데, 그냥 확실히 말해두고 싶었어.”
“응. 이해해. 미안해, 정말.”
나에 대한 신뢰를 잃고도, 그는 나와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그를 다시 만나기 전 머릿속을 떠다녔던 수많은 상상의 갈래들이 한쪽으로 모였다. 우리는 헤어지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마음이 변할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네가 필요하고, 너는 내가 필요했다. 그것만으로 지금의 우리에겐 충분했다.
숙소로 돌아와 그의 옆에 누웠다. 그를 꼭 안았다. 이제 이 순간이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다. 떨어져 있는 동안 가장 많이 떠올린 순간은, 언니의 전화를 받기 전,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잠에서 깨 그와 안고 있던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순간. 특별할 것 없는 그 아침이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힘겨웠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그런 아침을 맞이할 거였다. 그런 아침이 앞으로도 내게 주어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다음 날, 정오 가까이 되었을 때 눈을 떴다. 남편은 옆에서 자고 있었다. 잠깐 그를 꼭 안은 후에 침대에서 일어나 객실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머무는 2층에는 투숙객들이 간단히 취식을 할 수 있는 공용 공간이 있었다. 마침 아무도 없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에게는 비행기를 타기 전, 친구 집에서 잠깐 머문다고 둘러댄 상황이었다. 엄마는 하루 휴가를 받아 집에서 쉬고 있었다.
“잘 있나?”
“어... 핸드폰이 불편하네...”
“시간 지나면 익숙해질 거다.”
머뭇거리던 엄마가 말했다.
“지소야. 엄마 노트북 친구한테 주고 가라. 엄마 그거 필요하다.”
“엄마.”
“내가 다시 물어봤는데, 사기 아니란다.”
“다시 물어봤다고? 엄마가 그 사람들한테 다시 연락했다고?”
“그래, 물어봤는데 사기 아니래.”
“엄마, 어떤 사기꾼이 ‘제가 지금 사기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그리고 내가 엄마 연락처 그 사람들한테 안 알려주려고 번호를 바꾼 건데, 엄마가 스스로 연락을 했다고?”
“사기 아니란다. 그니까 친구한테 노트북 주고 엄마한테 택배로 보내라 해라.”
가슴이 조여 왔다. 엄마는 언제까지 이럴까. 엄마는 언제까지 믿지 않을까. 겨우 핸드폰 번호를 바꿔놨더니 사기꾼들에게 다시 연락하는 엄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엄마의 이전 핸드폰에 필요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데이터를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화근이었다.
엄마의 전화를 끊어버리고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다. 미리 인증해 뒀던 엄마의 계정으로 카카오톡 PC 버전을 열었다. 엄마는 각 리딩방의 매니저에게 따로 연락해 ‘이러이러한 것들이 사기라고 하던데, 맞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당연하게도 말도 안 되는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엄마는 믿고 싶어서, 계속 믿어야 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
엄마의 카카오톡에서 그 대화방을 삭제하고, 매니저들의 프로필을 차단했다. 그리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퇴근하고 집에 가면 엄마 잘 때 새 폰이랑 옛날 폰 다 가져와서 옛날 폰 카톡 탈퇴하고 포맷해버리고, 새 폰에서 이상한 번호 다 지워버리자.”
밤이 되었고, 아빠는 엄마가 자는지 몇 번을 들여다봤지만 이상함을 눈치챈 엄마는 쉽사리 잠에 들지 않았다. 포기하고 나도 잠을 청하려는데 아빠에게 메시지가 왔다.
‘엄마 폰 둘 다 가져왔다.’
우선 아빠가 엄마의 옛날 폰에서 사용하던 카카오톡 계정을 탈퇴시키도록 했다. 혹시나 엄마가 이전 계정을 복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리딩방과 관련된 연락망도 모두 끊어놔야 했다. 그리고 엄마의 옛날 폰을 포맷해버렸다. 그 핸드폰을 그대로 두는 건 득 보다 실이 훨씬 컸다. 엄마는 새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전 핸드폰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중독을 부추기는 연결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엄마의 전화번호부에서 이상한 번호를 모조리 지워야 했다. 전화번호부를 초기화하면 너무 번거로울 것 같아서 이전 핸드폰에서 백업해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이상한 번호들을 지울 수 있었을 텐데 급하게 떠나오느라 놓친 부분이었다. 엄마가 깰까 봐 아빠와 통화를 하지 못하고, 아빠가 엄마의 핸드폰 화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면 내가 확인하고 아빠에게 지시하는 방법으로 엄마의 전화번호부를 정리했다. 아빠도 나도 모르는 사람의 번호 같은 건 모조리 지워버렸다. 리딩방 매니저와 통화를 한 내역이 있었기 때문에 최근 통화목록도 다 삭제했다.
하루 사이에 설치한 이상한 앱들도 다 지우고, 인터넷 창도 다 지웠다. 그리고 내 컴퓨터에서 엄마의 아이클라우드에 접속할 수 있도록 인증 번호도 받아서 연결해 버렸다. 엄마가 투자 관련 정보를 캡처해 사진첩에 저장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한 시간가량이 지난 후, 우리의 작업은 일단락되었다. 원격으로 엄마를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엄마와 떨어져 있는데도 나는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남편과 자주 가던, 우리가 좋아하던 단골 식당들에서 밥을 먹으며 둘만의 기억을 되살릴 때도, 마음 한 구석에는 계속 엄마가 있었다. 정확히는 엄마가 또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까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다. 엄마에게 뭐 하고 있냐는 메시지가 오면 가슴이 철렁했고, 답장을 하고 싶지 않아서 미루다가도 완전히 잊어버리지 못했다. 숙소로 돌아오면 바로 노트북을 열어 엄마의 카카오톡과 아이클라우드 사진첩을 살펴봤다. 엄마는 리딩방이 사기라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자신의 증권계좌로 할 수 있는 선물 투자 방법을 다시 찾아보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보일 때마다 다 지워버리면서도 답답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엄마를 감시하면서 마음 졸여야 하는 걸까. 지금의 나는 엄마와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었다. 엄마가 투자를 또 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나는 극도로 우울해졌고, 엄마가 멀쩡해 보이면 조금 나아졌다.
내가 비행 중이라고 말했던 시각이었다. 엄마에게 메시지가 왔다.
‘지소야, 엄마가 미안하다.’
가슴이 내려앉았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엄마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걸까. 최악의 경우에 대한 상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냥 갑자기 엄마가 정신이 든 것일 수도 있었다. 무서웠다.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잠재워야 했다. 그러면서도 무서운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런 거면 분명 금세 아빠나 언니에게 연락이 오겠지. 아닐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내가 비행기를 타고 있는 줄 아는데, 지금 답장을 보낼 수는 없다.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며 10시간을 보냈고, 답장을 했다. 아빠와 언니의 답장에서도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엄마를 떠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눈앞에 없는 엄마가 무슨 짓을 할지 걱정되었고, 남편의 옆에서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나에게 무언가 필요했다. 이런 생각을 잠재울 무언가가 절실했다.
도박중독치유센터에서 가져온 책, <잃어버린 나를 찾는 희망 안내서 2>를 집어 들었다. 지금의 나를 구할 수 있는 해답을 찾을 수 있길, 애원하는 마음으로 한 글자씩 읽어 내려갔다. 도박중독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대목을 지나 3장, ‘나 먼저 일어서기’에 다다랐다.
‘도박자의 도박문제로 고통받는 가족들은
도박자의 치유에만 관심을 기울이곤 합니다.
가족의 고통을 더는 방법은 오직 도박자의 변화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도박자에 휘둘려 자신의 삶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해당 챕터에서 강조해 말하는 점은 다음과 같았다.
‘도박자의 도박행동은 당신에 의해 변화되지 않습니다.’
‘변화하고 싶지 않은, 또는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애쓰기보다는 그 사람의 문제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당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스스로 자신의 정서적 고통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었다.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방법, 명상 이완 훈련을 하는 방법, 그리고 평상시 불안을 예방하기 위한 합리적인 계획 세우기, 스스로에 대해 너무 높은 기준을 세우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기, 건강에 신경 쓰기 등, 어떻게 보면 뻔하고 새로울 것 없는 방법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말을 누가 못 하나’하면서 넘겼을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우선 책에 적혀 있는 대로 심호흡을 했다. 속으로 하나, 둘, 셋, 넷을 천천히 세면서 숨을 들이쉬고, 잠깐 멈췄다가, 다시 하나, 둘, 셋, 넷을 세면서 숨을 내쉰다. 이것을 네다섯 번 반복한다. 오래 들이마시고, 오래 내쉬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부분은 ‘도박으로 인한 결과를 대신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이 도박을 부추기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도박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대처의 예시 중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도박을 하지 말라고 심하게 잔소리를 한다.
분노를 표현한다.
정서에 호소하여 간청하거나 운다.
가르친다.
도박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한다.
지키지 못할 내용의 최후통첩을 한다. (예: 이혼, 의절 등)
내가 그동안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어렴풋이 알았지만 안내서를 읽으며 더 확실해진 것은, 내 삶을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면서 내 삶을 더 이상 갉아먹을 수는 없었다. 나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이제 나를 돌봐야 했다.
독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까진 2주가 남아있었다. 아빠와 엄마, 언니는 내가 이미 독일로 돌아간 줄 알고 있었고, 시부모님은 남편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지금의 마음으로 서울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우리는 둘이서 서울의 이곳저곳을 다녔다. 우리가 살던 합정, 망원, 상수 근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건대입구에서 치과에 가고, 강남에서 운전면허증 갱신을 하는 등 필요한 일들을 했다. 서울에서 보내는 시간은 추억을 돌아보게도 했지만, 동시에 트라우마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주하게도 했다. 내가 살던 동네이기도 했던 회사 근처를 걸었을 뿐인데 어두운 기억들이 쏟아져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이제 서울에 집이 없는 우리는 서울을 여행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행지에서 쓰는 것과 동일한 숙박비와 식비가 계속해서 들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익숙한 이곳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었다. 남편은 이미 3주 가까이 서울에 있었고, 나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서울이 지겨워졌다. 우리는 서울에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한국에 오기 직전, 우리는 잠깐 이별 여행을 계획했다.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그때 생각한 것이 도쿄였다. 둘이 함께했던 첫 해외여행지는 후쿠오카였고, 그 후에도 각자, 또 함께 여러 번 일본을 방문했지만 둘 다 도쿄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이야기만 나누다 이미 한국 방문으로 지출이 크다고 판단해 흐지부지 되고 말았었다.
그런데 어차피 서울에서 남은 시간 동안 지출을 해야 한다면, 같은 돈을 쓰더라도 도쿄에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엑셀을 열어 경비를 비교했다. 서울에 있을 때와 도쿄에 갈 때.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도쿄행 비행기표 값이 들긴 하지만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의 혼성도미토리를 이용하면 숙박비도 서울에서보다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마침 엔화 환율은 100엔당 900원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3일 후에 도쿄로 떠났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 시내로 가는 열차를 탔다. 엄마에게 온 메시지에 답장을 했다. 엄마의 핸드폰을 보고 있냐고 묻는 엄마에게, 내가 보지 않게 도와달라고 했다. 엄마는 투자를 하지 않으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걸 하지 않는 게 고통에서 벗어나는 거라고 말했다. 도박중독치유센터의 상담사 선생님의 명함을 보내며, 엄마가 너무 힘들면 상담을 받으라고, 그게 엄마가 살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방을 배정받았다. 8개의 침대가 있는 방이었다. 아래층에 4개, 위층에 4개의 침대가 있었고, 마치 동굴처럼 양쪽과 위아래가 모두 벽으로 막혀있고 침대 앞 쪽에 커튼도 있어 도미토리임에도 아무도 볼 수 없는 개인 공간이 보장되는 곳이었다. 문과 가장 가까운 쪽 침대의 위층을 내가, 아래층을 남편이 사용하기로 했다.
짐을 간단하게 풀고 아사쿠사의 거리로 나왔다. 일본에 오면 항상 들르는 프랜차이즈 텐동 가게인 ‘텐동텐야’가 근처에 있었다. “이랏샤이마세!” 활기찬 점원의 인사를 들으니 일본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자리를 잡고 앉아 테이블마다 있는 태블릿 PC로 생맥주 두 잔과 텐동 두 그릇을 주문했다. 1770엔. 만오천원 정도의 가격이었다. 독일에서, 심지어 한국에서도 이제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시원한 생맥주와 따끈한 텐동이 우리 앞에 놓였다. 부드럽고 얇은 튀김옷과 달짝지근하고 짭조름한 간장 소스가 뿌려진 튀김과 밥을 허겁지겁 입에 넣었다.
“나 지금 진짜 행복해.”
“나도.”
우리는 신나게 맥주잔을 부딪쳤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무 계획도 없이 도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고 긴자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서 조금 걷다 보니 높다란 건물 꼭대기에 있는 단팥빵 사진이 보였다. 부드러운 단팥빵. 독일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단팥빵.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매장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연히 들어온 이곳은 알고 보니 ‘기무라야’라는 150년 전통의 빵집으로, 단팥빵을 최초로 만든 곳이었다. 갖가지 다양한 빵이 넘치게 쌓여 있었고, 맛보고 싶은 것들 투성이었지만 꾹 참고 앙버터빵 딱 한 개만 사서 밖으로 나왔다.
긴자역 근처를 한참 걷다, 잠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도쿄역으로 향했다. 일본에 오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베를린에서 소매치기를 당하면서 잃어버린 내 토토로 동전지갑을 다시 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도쿄역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이 한층 가득 모여 있었고, 그중 지브리 캐릭터 샵인 ‘동구리 공화국’ 또한 있었다.
그곳은 천국이었다.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퀄리티의, 귀여운 물건들로 가득했다. 특히 지브리 샵과 짱구, ‘크레용 신짱’ 샵에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남편과 나는 결국 텍스프리를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금액을 맞춰 토토로 모양 반찬 그릇, 키키가 그려진 손수건 등을 마구 담았다. 그런데 내가 찾는 토토로 모양 동전지갑이 없었다. 아쉬운 대로 짱구 샵에 가서 ‘부리부리 돼지’가 그려진 보라색 동전지갑을 샀다. 한 손에 가득 들어오는 동그란 부리부리 돼지를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다.
다시 아사쿠사로 돌아와 라멘집으로 향했다. 역시나 일본에서 언제나 방문하는 프랜차이즈 돈코츠 라멘 가게인 ‘이치란’이었다. 독일에서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던 맛있는 돈코츠 라멘이 이곳에는 널려 있었다. 진한 육수의 국물로 입을 적시고, 적당히 꼬들하게 익은 세면을 입 안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너무 맛있었다.
“이 맛이지!”
“이 맛이야!!!”
부른 배를 두드리며 깜깜해진 아사쿠사의 밤거리를 걸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순수한 기쁨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낯선 길을 걷는 여행지에서의 설렘. 깨끗한 즐거움을 자각하는 것과 동시에 아빠와 엄마가 떠올랐다. 차가운 방에서 전기장판에만 의지해 각자 이불을 꼭 덮고 있을 엄마와 아빠가 눈에 아른거렸다. 나는 지금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 걸까.
검고 빛나는 하늘로 생각을 덮으려 애썼다. 나쁜 딸이 되더라도, 잠깐은 잊고 싶었다.
도쿄에서의 일주일은 순식간이었다. 간간이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가족 모두에게서 조금은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전자도서관 앱으로 도쿄가 배경인 책을 두 권 빌려 읽었고, 도쿄의 맛집을 소개하는 책을 읽으면서 음식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얻으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도쿄는 내게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과 만화 속 도시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NANA』에 나오는 햄버거 가게 ‘Jackson Hole’에 방문하고, <꽃보다 남자>에서 츠카사와 츠쿠시가 첫 데이트를 하기 위해 만난 ‘에비스 가든 플레이스 시계탑 광장’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도쿄 타워』의 도쿄 타워, <심야 식당> 오프닝 속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이 오가는 ‘신주쿠 거리’. 그리고 <아오링 도쿄>에서 소개한 ‘코엔지’까지. 아주 오래전부터 최근까지 좋아했던 작품들의 품속으로 들어가 안긴 것 같은, 그런 시간이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 내가 좋아하는 걸로 가득 찬 시간. 닳고 닳아 바닥까지 가버린 마음을 순수했던 마음에 대한 기억으로 조금은 끌어올린, 그런 여행이었다.
그렇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고, 우리는 서울로, 그리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