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를 위한 길잡이
엄마의 투자중독문제를 알게 되자마자 생각한 건 엄마에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막연히 정신과에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비용이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던 중,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곳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공기관으로, 중독 및 도박문제 관련 예방, 치유, 재활 등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홈페이지에서 좀 더 상세히 내용을 살펴보니 도박 중독자의 치유를 위한 프로그램이 단계별로 계획되어 있었고, 중독자뿐만 아니라 가족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도 있었다. 각 지역별로 해당 사업을 진행하는 센터가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그중 하나가 우리 도시에 있었다.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 홈페이지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같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도박문제예방치유원에서 제공하는 '도박문제 넷라인(Net-Line)' 서비스를 통해 상담을 신청하는 방법은 전화상담, 문자상담, 채팅상담, 게시판상담으로, 크게 네 가지가 있었다. 게시판상담을 제외한 세 가지 방법은 365일 연중무휴로,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상담이 가능했다. 나는 그중 채팅상담을 선택했다. 홈페이지에서 간단하게 상담 신청서를 작성한 후, 채팅상담대기실에 입장할 수 있었다. 방이 6개 정도 있었고, 각각 상담사의 닉네임과 현재 상태(상담 중, 입장가능 등)가 표시되었다. 모든 상담사가 상담 중이어서 15분 정도 기다린 후에 이전 상담이 끝난 한 상담사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희 엄마가 투자 중독을 앓고 있는 것 같아서 연락드립니다. 가족들 모르게 빚을 1-2억 정도 만들었고요. 해외 선물 리딩방을 통해서 투자를 하다가 돈을 많이 잃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이 리딩방이 가짜 거래소를 통해서 사기를 치고 있는 곳인데, 엄마에게 사실을 알려주고 증거를 보여줘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센터에서 제공해 주시는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정신과에 데려가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어머님 같은 경우에는 정확한 상담을 해봐야 알겠지만 우선 저희 센터 프로그램과 병원을 병행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개인상담은 상황에 따라 4주에서 8주까지, 주 1회로 진행됩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혹시 가족상담 프로그램도 있는 걸로 아는데 그건 어떻게 진행되나요?'
'가족상담의 경우에는 최대 4회까지 진행됩니다.'
'그럼 혹시 비용은 어떻게 될까요?'
'비용은 전액 무료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일회성이 아니라 꾸준히 진행되는 상담이 무료라니. 우울증 치료를 받았던 친구가 알려준 정신건강의학과의 시간당 상담 비용은 최소 10만원이었다. 게다가 가족상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그동안 큰 스트레스를 받아온 아빠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럼 가족상담과 개인상담 모두 진행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제가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서, 가족상담 1회는 저와 아빠가 함께 가고 이후에는 아빠만 가셔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도 가능할까요?'
'그러시면 아버님이 직접 상담 신청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정보 보호의 이유로 본인이 직접 연락을 주셔야 하고요. 아버님이 연락하셔서 접수해 주시면 다시 거주하시는 지역의 상담사가 추가로 연락을 드리고, 일정을 잡으실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아빠가 연락하시라고 하겠습니다. 전화로 연락드리면 되나요?'
'네. 1336번으로 전화 주시면 됩니다.‘
상담사와 대화를 마친 다음, 바로 일하고 있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상황을 설명했다. 아빠는 시간이 될 때 바로 전화를 해 보겠다고 했다.
잠시 후, 아빠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전화로 간단하게 접수를 마쳤다는 내용이었다. 상담사에게 내가 들은 대로 지역센터에서 2-3일 이내에 연락이 올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다 아빠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기 시작했다.
“지소야, 근데 그 전화받은 분이 내보고 ‘혹시... 자살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라드라. 그래서 내가 ‘아이고, 아입니더.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습니더. 그래도 살아야지예.’ 그랬다 아이가. 그라니까 ‘혹시 그런 생각이 드시거나 긴급한 상황일 때 언제든지 바로 연락을 주십시오.’ 하드라.”
상담사가 그런 질문을 전화로 아빠에게 던졌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아빠가 어떠한 망설임 없이 ‘자살을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대답한 것에도 놀랐다.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 그런 엄마를 보며 힘들었을 아빠였다. 평생을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도 성실히 살고, 이제 일흔이 다 되어 조금 편하게 살겠다 싶었는데, 아내의 도박 중독으로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빚을 끌어안은 아빠. 그런 상황에서도 삶의 의지를 놓으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는 아빠에게 고마웠다. 아빠가 강한 사람이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도박중독이 중독자뿐만 아니라 중독자의 가족들까지 사지에 몰아넣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자살충동이 도박중독자의 가족에게 얼마나 빈번한 일이면 짧은 전화 상담에서 그걸 바로 묻는 걸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박중독 때문에, 그것도 가족의 도박중독 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내놓는 걸까.
지역센터의 첫 상담은 처음 전화를 건 날로부터 약 10일 후에 진행할 수 있었다. 은행 업무 때문에 상담 시간에 조금 늦어서 마음이 급했다. 아빠는 이미 조금 일찍 퇴근한 후에 먼저 센터에 도착해 있었다. 조급한 나와 달리 엄마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걸어왔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며 엄마의 팔을 잡고 센터 안으로 이끌었다.
아빠가 보이지 않아 전화를 걸었다. 센터 안의 여러 방 중 한 곳의 문이 열렸고 몸집이 크고 선한 인상의, 안경을 쓴 한 남성이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라고 했다. 엄마도 함께 들어올 줄 알았는데, 엄마는 가족상담이 끝날 때까지 우선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그 사이에 어딘가로 도망가 버릴까 걱정됐지만 어쩔 수 없이 엄마를 혼자 두고 상담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준 분은 내게 명함을 건네며, 우리를 담당하는 상담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아빠는 이미 상담실 안에 앉아 있었다. 상담사에게 늦어서 죄송하다는 인사를 건네고 아빠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빠는 내가 앉자마자 나를 보고 안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알았다.”
“어????? 어떻게???”
“작은 아빠가 어제 가서, 엄마가 알아야 할 것 같다면서 얘기했단다.”
“왜????? 그때 얘기 안 하기로 같이 얘기했잖아.”
가슴이 철렁했다. 할머니가 이 일을 안다고?
“나도 몰라. 작은 아빠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랬단다.”
“그래서? 할머니는? 안 쓰러지셨나?”
“어. 아빠한테 전화 왔는데 엄청 침착하시던데. 돈 필요하면 말하라고 하시더라.”
온갖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작은 아빠는 왜 상의도 없이 혼자서 일을 이렇게 만든 거지? 할머니는 이제 엄마를 보려고 할까? 내가 괜히 고모 댁에 가서 얘기했나? 이 사실을 알린 일이 처음부터 잘못이었던 걸까? 원래도 걱정이 많은 할머니는 하루 종일 이 일로 걱정하고 신경 쓰실 텐데. 일이 왜 이렇게 된 걸까.
우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상담사가 말했다.
“주변 가족 모두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잘하신 거예요. 숨겨도 어차피 알려질 일이고, 하루빨리 알리는 게 낫습니다.”
그래도 할머니에게는 알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이미 알게 되신 거,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진 빚을 해결하려고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을 팔아서 할머니 댁에 들어가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할머니가 알게 되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음... 집은 어머님 명의인가요?”
“엄마 명의 집은 이미 그걸 담보로 엄마가 대출을 받아서 날아갔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아빠 명의 집까지 팔아서 빚을 정리하려고요.”
“일단, 어머님 빚은 가족 분들이 절대 갚아주시면 안 됩니다. 어머님 빚은 스스로 해결하셔야 해요.”
“저희도 그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엄마 소득으로는 빚을 절대 갚을 수가 없어요.”
“사실 도박 중독 문제에서, 돈 문제가 가장 해결하기 쉽습니다. 개인회생이나 개인파산 등 제도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법무사 상담도 받아봤는데, 엄마 같은 경우에는 두 가지 전부 어렵다고 하시더라고요...”
“음... 저희가 어떻게 하시라고 정확하게 말씀드릴 순 없지만요. 그게 변호사나 법무사에 따라서 의견이 다를 수가 있긴 한데, 대부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니면 신용회복위원회에서도 상담을 한번 받아보세요.”
돈 문제가 가장 해결하기 쉽다는 상담사의 말이 의아했다. 지금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문제가 돈 문제였다. 엄마는 한 달에 고작 100만원을 벌고 있고, 그 일자리마저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환갑이 훌쩍 넘은 엄마의 나이에, 특히나 지방에서 더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했다. 엄마는 지금도 아픈 허리로 내내 서서 밥을 짓고 음식을 한 후 퇴근해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서 한참을 누워 있곤 했다. 그 몸으로 투잡, 쓰리잡을 뛰는 건 오히려 병원비 추가 지출을 늘리는 셈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찾아봐도 엄마가 스스로 돈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는데, 이렇게 힘든 일이 가장 쉽다면, 대체 우리 앞에는 어떤 더 어려운 문제가 있는 걸까.
상담사는 다시 우리를 보며 말을 시작했다.
“제가 이렇게 가족상담을 오신 가족 분들에게 가장 먼저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곳에 오신 이후로, 지금 이 시점부터 여러분은 지금까지 벌어졌던 모든 일을 과거에 두셔야 합니다. 두 분은 어머님의 투자 중독을 치유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에 오셨죠? 그렇다면 앞으로 어머님께 과거의 일에 대해서 탓하거나,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 같은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은 중독자의 자존감을 낮아지게 하고, 죄책감을 갖게 만듭니다. 죄책감을 느끼면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어지고, 그러면 다시 도박에 손을 대게 됩니다. 과거의 일은 과거에 두고,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 살아가셔야 합니다. 중독자가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주변 사람, 특히 가족의 응원과 지지가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리고는 방 한쪽에 있는 칠판으로 가서 설명을 이어갔다.
“최근에는 카지노나 경마장 등등 누구나 생각하는 도박 이외에 투자나 주식 중독도 도박 중독의 일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행운에 기대서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행위들이 모두 도박의 범주에 속합니다.
우선 도박을 왜 하느냐, 도박의 동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흥분, 사교, 유희, 회피, 금전’, 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어머님의 경우에는 ‘금전’에 해당하겠죠. 이 도박 중독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이 단계는 V자 형태를 띠는데요. 처음에 도박을 통해서 ‘승리 경험’을 하게 됩니다. 초심자의 행운으로 돈을 따는 것이죠. 그래서 또 도박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승리가 계속될 리가 없겠죠. 그러면 손실을 봅니다. 그게 다음 단계입니다. 운이 좋으면 ‘승리’와 ‘손실’을 계속 왔다 갔다 합니다. 대부분은 그러다 돈을 계속 잃습니다. 갖고 있는 돈을 모두 잃어버리는 거죠. 그러면 ‘좌절’ 단계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감당하지 못하는 대출을 계속 늘리고, 주변 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하면서 돈을 빌립니다. 그것도 계속하다 보면 당연히 한계가 있겠죠. 그 빌린 돈도 다 잃고 나면 그다음, 가장 바닥을 치는 단계가 ‘절망’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주변인과의 관계가 다 망가지고, 심하면 이혼을 하게 되고, 우울증을 심하게 겪거나, 자살 사고 등을 하게 됩니다. 중독자 분들이 대부분 이렇게 바닥을 치고 나서야 저희를 찾아오십니다. 바닥을 치기 전까지는 계속 돈을 다시 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저희에게 오시는 단계가 ‘결심’ 단계로, 이제 도박을 끊고 다시 새 삶을 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가 ‘재건’ 단계입니다. 채무 상환 계획과 앞으로의 돈 관리 계획을 세우고, 가족과의 관계도 좋아지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잘 흘러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그런데 도박 중독의 무서운 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재발’이 거의 90%의 확률로 발생한다는 겁니다. 보통 이 ‘결심’ 단계와 ‘재건’ 단계 사이에 다시 도박에 손을 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먹고 도박을 끊으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거든요. 빚을 갚아나가는 일도 마음처럼 쉽지 않고, 상황이 이렇게 된 데 죄책감을 느낍니다. 특히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시 또 도박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번엔 될 것 같은데, 딸 수 있을 것 같은데, 따면 이 모든 걸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도박 중독자의 재발은 디폴트 값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막상 닥치면 가족 분들도 처음보다 더 힘들어하십니다. 이게 고쳐지기는 하는 걸까, 하면서 가족 분들이 절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의지를 가지고, 또 가족들의 지지와 응원으로 일상을 되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역할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재발을 하는 건 치유 과정 중 일부입니다. 재발을 했을 때, 좌절하지 마시고 그 과정을 잘 넘어갈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금전적으로 더 큰 손해를 막을 수 있도록 어머님의 재산이나 계좌 등에 장치를 해두시는 게 좋습니다.”
재발이 디폴트라니, 이게 끝이 아니라니. 그럼 우리는 언제 다시 엄마가 도박을 시작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마음 졸이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어머님의 재발을 걱정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도박 중독자의 가족들은 ‘공동 의존’이라는 증상을 겪습니다. 중독자가 도박을 하면 내 삶도 불행해지고, 도박을 안 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중독자의 도박 행위를 자기 탓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십니다. 그런데 일차적으로, 도박자의 도박 행위는 도박자의 잘못입니다. 그 잘못은 스스로 책임지게 해야 합니다. 가족 여러분은 잘못이 없습니다. 대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됩니다. 도박자의 도박 행위와 본인의 삶을 분리하셔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혹시나 나중에 도박 행위가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가족 분들은 본인의 삶을 사셔야 합니다. 그 문제를 본인의 삶으로 끌어오지 않으셔야 합니다. 중독자에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옆에 가족 분들이 계시다는 정서적 안정을 주는 것과 잘못을 대신 책임져주는 것은 다릅니다. 그걸 구분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직도 계속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 여기 오는데도 자기는 마음만 먹으면 그만할 수 있다고, 중독 그런 거 아니라고 계속 부정하고요. 개인 상담을 진행하면 좀 나아지는 걸까요?”
“상담은 본인이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제 발로 찾아오는 경우가 아니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저희가 말씀을 드리고, 가족 분들이 옆에서 말씀을 드려도 본인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머님은 지금 아직 바닥을 치는 단계까지 안 오신 것 같네요. 어머님은 아직 좌절 단계 정도에 계신 것 같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깨닫는 단계까지 오지 않으면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어떡해요? 투자를 더 하고 더 큰 좌절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아니면 아빠랑 정말로 이혼을 시켜서 더 좌절하게 만들어야 하나요?”
“그러실 것까진 없습니다. 일단 조금 지켜보시죠.”
“그럼 오늘 엄마 개인 상담은 진행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어머님께 한번 여쭤보세요. 본인이 완강하게 거부하시면 의미가 없고요.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얘기나 해보지 않겠냐고 말씀해 보시고, 괜찮다고 하시면 한번 어머님이랑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상담사는 아빠와 진행하는 가족 상담도, 횟수나 시간이 꼭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며 예약을 잡고 주 1회로 진행하지 않더라도 필요할 때 언제든 전화 상담도 가능하니 일정에 맞게 편하게 해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건넸다. <잃어버린 나를 찾는 희망 안내서 2>라는 제목이었다.
“도박 중독자 가족 분들을 위해서 저희가 제작한 안내서입니다. 대부분 중요한 내용은 여기에 다 있으니 시간 되실 때 찬찬히 한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궁금한 점이나 문제 있을 때 언제든지 저에게 연락 주십시오.”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론가 도망쳤을까 봐 걱정했던 엄마는 대기실에 얌전히 잘 앉아 있었다. 아빠와 내가 다가가자 뾰로통한 얼굴로 우리를 봤다.
“왜, 뭐라던데?”
“그냥 얘기했지 뭐. 엄마, 엄마가 진짜 안 하고 싶으면 안 하고 그냥 가도 되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선생님이랑 얘기 한번 나눠 볼래?”
“안 해도 된다고?”
“어. 엄마가 진~짜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대. 그래도 여기 온 김에 잠깐이라도 선생님이랑 얘기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
“......... 뭐, 얘기하는 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보지 뭐.”
생각보다 순순히 상담실로 들어가는 엄마를 상담사는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 줬다. 엄마를 기다리며 센터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벽에는 도박 중독에 대한 이해를 돕는 여러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대기실 한쪽에는 상담사 선생님에게 받은 것과 같은 책이 수십 권 비치되어 있었다. 방문자들이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게 구비된 책이었다. 가족을 위한 안내서인 2권 이외에도 도박 중독자 본인을 위한 1권도 있었다. 나중에 혹시 엄마가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빠에게 1권을 한 권 챙겨주고, 독일에 가져가서 읽어보기 위해, 나를 위한 1권과 2권을 각각 한 권씩 더 챙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상담실에서 나왔다. 엄마는 상담실에서 나오며 상담사에게 밝게 인사했다. 아까보다 조금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무슨 얘기했어?”
“뭐, 그냥 얘기했지. 선생님이 내 이야기를 참 잘 들어주시더라. 자기를 적게 보는 게 좋은 거라고 그러시던데.”
“그래, 선생님이 참 좋으시더라. 엄마, 여기는 상담도 다 무료래. 그러니까 돈 걱정하지 말고, 상담도 꾸준히 받아보면 좋을 것 같은데. 엄마가 그동안 이 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힘들었잖아. 여기 와서 이야기도 하고, 이야기도 듣고 하면 엄마 마음도 좀 편해지고 도움이 될 것 같은데.”
“..... 그래 뭐, 힘들 때 한 번씩 와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엄마의 반응이 반가웠다. 센터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 줄어든 것만으로도 희망이 보였다. 내가 원하던 대로 아빠와 엄마의 정기적인 상담 일정을 아직 확정하진 못했지만, 깜깜하던 눈앞의 길에 가로등과 이정표가 생긴 기분이었다. 상담 선생님의 말을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과거는 과거에 두자. 미래를 보자. 엄마에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자.
저녁 식사를 위해 돈가스를 파는 식당으로 향했다. 매장이 크고 정갈해서 엄마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오던 곳이었는데, 엄마도 아빠도 아주 오랜만에 온다고 했다.
센터에 다녀와서 아빠도 마음이 조금 편해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잠시 아무 일이 없었던 과거의 어느 날처럼, 조금 안온하게 저녁 식사를 즐겼다. 내가 다시 떠나기 하루 전, 당분간 다시없을, 아빠와 엄마와 모두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는 남은 일이 있었다. 저녁 8시가 되기 전, 엄마의 휴대폰 번호를 변경해야 했다. 엄마에게 적당히 둘러대고 휴대폰을 가져와 방에 들어갔다. 오전에 중고거래로 구입한 아이폰에 엄마의 유심카드를 끼우고, 통신사 홈페이지로 들어가 번호 변경을 진행했다. 엄마가 원래 사용하던 핸드폰의 정보는 혹시 몰라 전날 엄마의 노트북에 파일을 백업해 두었다. 엄마의 노트북도 포맷해서 가짜 거래소 등의 정보를 모두 지워버릴 생각이었지만, 아직 경찰서에 사건 접수를 하기 전이라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기존에 쓰던 핸드폰도 내일 경찰서에 다녀온 다음 아빠에게 부탁해 포맷할 예정이었다. 뭔가 모두 삭제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내심 불안했다. 특히나 엄마가 거래를 진행하는 노트북을 두고 가는 것이 꺼림칙했다. 그 노트북은 원래 집에 있던 물건이 아니었다. 아빠에게 물었더니,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같이 운동하는 친구가 줬다며 가져왔다고 했다. 역시나 이상했다. 이걸 그대로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노트북을 몰래 독일로 가져가기로 결심했다.
번호 변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엄마에게 갔다.
“자, 엄마 새 폰.”
“이게 뭐고? 내 폰은?”
“엄마 원래 쓰던 거 좋지도 않고, 사기꾼들한테 번호가 너무 많이 노출돼서 내가 바꿨다. 엄마 새 번호는 원래 번호에서 중간 번호만 다르니까 외우기 어렵지 않을 거고, 내가 여기 메모장에 적어 놨다. 예전 폰은 며칠 후면 이제 다 지워지고 못 쓰니까 앞으로 이거 써라. 이거 엄마가 쓰던 것보다 훨씬 좋은 거다.”
엄마는 할 말이 많지만 입을 꾹 다물고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엄마에게 간단한 아이폰 사용 방법을 알려주며 달랬다.
“엄마, 이거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다 아이폰을 쓰냐면서 물어볼걸? 내가 엄마 주려고 액정 필름도 새로 붙이고 케이스도 새로 샀다. 여기 카드도 넣어 다닐 수 있다. 이거 내 체크카든데, 여기에 넣어 둘 테니까 엄마 병원 다닐 때 돈 걱정하지 말고 꼭 내 카드로 결제해라, 알겠제? 내가 돈이 없어도 엄마 아픈 거 고치는 데는 돈 쓸 수 있으니까, 언니랑 내가 같이 해서 낼 거니까 꼭 이 카드로 쓰고 꾸준히 다닌다고 약속해야 한다.”
“느그가 무슨 돈이 있노...”
“엄마 병원비 낼 돈은 있다. 엄마가 안 아픈 게 제일 중요하니까, 엄마도 우리를 생각해서라도 병원 꼬박꼬박 다녀야 한다, 알겠제?”
이제 짐을 싸야 했다. 내가 다시 한국에 올 때, 이 집에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랐다. 내 추억이 담긴 모든 물건들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모두 가져갈 수는 없었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들을 챙겨야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과 어릴 때부터 모은 음반들 중 가장 소중한 것들을 캐리어에 넣었다. 나를 살게 한 것들. 그걸 그냥 버려지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처음 독일에 가기 전 두고 왔던 옷 몇 가지도 챙기고, 통조림 햄과 참치 몇 개, 그리고 아빠가 얼마 전에 어딘가에서 받아온 마른 멸치와 건새우 등을 넣으니 30인치 캐리어가 가득 찼다. 내일 엄마가 출근한 사이 노트북까지 넣으면 완료였다.
자기 전, 아빠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다. 내일 내가 일어나기 전 아빠는 출근할 예정이었다. 더 있다 가면 안 되냐는 아빠에게 독일에 가기 전 서울에서 할 일이 있다고 둘러댔다. 아빠는 나에게 내가 와줘서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고맙다고 말하며 나를 안았다.
“무슨 일 있으면 이제 숨기지 말고 꼭 우리한테 말해야 한다. 멀리 있어도 연락해서 같이 해결할 수 있으니까. 또 아빠 혼자 힘들거나 하면 상담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도움도 꼭 받고.”
“그래, 그래. 알겠다.”
엄마가 있는 내 방으로 갔다. 이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내 방. 수많은 시간들이 스쳐갔다. 그 시간의 중심에는 엄마도, 아빠도, 언니도 없었다. 침대에 앉아, 또 컴퓨터 앞에 앉아 외롭지만 외롭지 않던 그 시간을 보내던, 홀로 있던 내가 거기에 있었다. 영화와 드라마, 소설과 만화책, 그리고 음악으로 가득 채우던 시간. 내 옆에 있는 사람들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또는 아주 멀리 있는 이들이 마음을 보듬어주던 그 시간들. 이 방에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이 구름이 되어 떠다녔다.
엄마가 나를 안았고, 나도 엄마를 안았다. 엄마의 뒤로 보이는 구름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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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나를 찾는 희망 안내서 3> : 도박문제 대처를 위한 법률·재정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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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기억을 꺼내어 쓰는 글의 주 2회 연재와 현생에 지쳐 모든 댓글에 답글을 달아드리지 못하고 있지만, 보내주시는 응원과 댓글 모두 소중하게 읽고 있습니다. 모든 댓글과 눌러주시는 라이킷, 응원이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얼마 남지 않은 연재의 끝까지 힘내서 솔직한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