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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랑 Feb 25. 2024

탈색

경남 통영

입원까지 남은 3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외래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패드를 챙겨 들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항암제에 절여지기 전 건강한(?) 육신일 때 여행을 가야 한다. 어디를 가야 여행다운 여행이 될까 고민을 하다가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거제도를 떠올렸다. 통영은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지만 거제도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번번이 방문 계획이 막히곤 했었다. 마치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껴두었던 거제도 여행을 드디어 실행할 때가 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늦어도 7시 출발이라는 계획과 달리 9시 반에 일어나고 말았다. 심지어 피로도 풀리지 않아 이 상태로 5시간 운전은 무리였다. 변수에 대처능력이 뛰어난 순도 99% P형의 기지를 발휘하여 침대에 누운 채로 타협에 들어갔다. 아마도 거제 여행이 번번이 막혔던 이유는 귀찮음과의 타협이 아니었을까 싶다.


차로 2시간 정도 거리의 여행지를 찾다가 항암치료에 들어가면 체력이 떨어져 장시간 운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음을 고쳐 먹었다. 헷갈릴 때에는 맨 처음 계획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 베스트인 법이다.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를 상황을 대비해 미리 만들어 놓은 가출키트(휴대폰 충전기, 잠옷, 속옷, 양말, 세면도구)에 여벌 옷 한 벌을 추가로 더 챙긴 뒤 거제로 향했다.




거제는 고사하고 통영까지 가는 것도 일이었다. 가는 길에 두 번의 휴게소에 들러 휴식 시간을 가져야 했다. 대한민국, 그 누가 작은 나라라 하였는가. 통영까지 한 시간 남짓 남겨놓은 두 번째 쉼터인 산청 휴게소에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그마한 반항심이 스멀스멀 일기 시작했다. 항암을 겪고 다시 자라난 애기 솜털 같은 머리카락을 다시 잃게 되는 게 속상했다. 드라이기 열바람도 조심스러웠던 머리카락에 탈색약을 먹일 작정이었다. 네이버 지도를 켜놓고 '통영 미용실'을 검색했다.


"네~ 00 헤어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그냥 탈색 한 번만 할 건데 금액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요."

"9만 원부터 세요."

너무 비싸 탈락.


"네~ OO헤어숍입니다."

"네, 탈색 한번 하는데 금액이 어떻게 되나요?"

"10만 원이에요."

"숏컷인데.. 그 금액부터 시작을 하는 건가요?"

"네, 일단 오시면 머리숱이랑 모질 보고 금액 조정될 수 있으세요~"

더 비싸네 탈락.


아니 뭔 놈의 탈색이 그렇게 비싸냐. 생각해 보니 미용실 평점은 의미가 없었다. 전략을 바꿔서 평점도 없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동네 미용실' 느낌의 상호만 골라서 전화를 걸었다. 숏컷 길이에 트리트먼트 없는 순수 탈색으로 협상을 시도했더니 역시나 인심 좋게 금액이 깎인다. 가장 파격적인 금액을 제시했던 남자 원장님이 운영하는 1인 미용실에 예약을 해놓고 다시 차를 몰았다.




"이리 와서 앉으세요."


예약시간에 맞춰 도착한 미용실엔 아직 앞 시간 손님의 머리 손질이 한창이었다. 초등학생 2명의 머리를 순식간에 자르고 계산까지 마친 원장님이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탈색 문의하신 분 맞죠? 머리가 얇고 색도 연해서 한 번만 빼도 잘 나올 것 같네요."


내 머리를 이리저리 쓸며 살펴보던 원장님이 기본금액으로 가격 책정을 마치고 커튼 뒤 은밀한 장소로 들어가 탈색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원장님 사실 제 머리가 2주 뒤면 다 빠질 예정이거든요."

"머리가 왜 빠져요?"

"제가 내일모레부터 항암을 시작할 거라서 곧 머리가 빠지거든요. 모발케어 뭐 이런 거 안 하셔도 되니까 제일 저렴한 약으로다가 색만 바짝 빼주세요."

"아이고, 이렇게 젊고 건강한데 어쩌다가.. 전혀 안 아파 보이시는데요."

"그러니까요. 억울해 죽겠어요."


원장님은 내 머리에 하얀 크림을 바르며 믿지 못하겠다는 말투로 연신 '아니, 근데, 정말, 전혀' 이 네 단어를 번갈아 외쳤다. 네, 저도 아니 근데 정말 전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서른여덟의 젊은 남자 원장님은 원래 공무원을 준비하던 공시생이었다고 한다. 한 평짜리 자그마한 고시텔에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햇빛도 제대로 보지 못하다 결국 어린 나이에 패혈증에 걸렸다고 한다.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갔던 힘든 순간을 이야기해 주셨다. 나의 항암 부작용은 댈 것도 아닌 원장님의 투병기에 안타까웠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건강하셔서 너무너무 다행이에요. 패혈증은 젊은 사람들도 많이 죽는 병인데."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죠. 평소에 감기 한번 앓아본 적도 없고 병원이랑 담을 쌓고 살았거든요."


큰 병치레한 사람들의 필수적인 레퍼토리


"아무튼 지금 이렇게 건강하시고 튼튼하시니까 항암치료도 잘 이겨내실 거라 믿습니다."


이미 저렴한 금액에서 더 할인을 받고 세상 촌티나는 샛노랑 머리를 나풀거리며 미용실을 나왔다. 머리색깔 따라 괜히 얼굴도 같이 창백해진 느낌이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오글 거리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지만 이게 뭐라고 마음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염색약 냄새 가득한 노란머리를 휘날리며 통영 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촌스러운 단무지 색 머리에 간간이 지나치는 어르신들 눈빛이 따듯하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반항심이 충족되었던 것 같다. 통영 시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내 머리 어때?"

"뭐야, 탈색했어?"

"어때, 어울려?"

"너가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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