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랑랑 Feb 25. 2024

아가씨 몸에 상처

케모포트 시술

이튿날 아침부터 비바람이 몰아쳤다. 거기에 바닷가 습기를 머금은 더운 여름 날씨에 불쾌감은 치솟았다. 짜증을 절로 유발하는 날씨 속에서도 거제의 자연은 아름다웠다. 비 오는 날씨에 가파른 해안절벽도로를 운전하는 건 꽤 피로도 높은 일이었지만 예민해질 때쯤 분위기 좋은 카페에 눌러앉아 해안가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는 재미도 있었다. 거제의 카페는 어딜 들어가나 커다란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었고 풍경 또한 예술이었다.


원래는 여행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올라가 다음 날 입원 준비를 해야 했지만 병실 배정이 바로 될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대로 여행을 끝내기 싫었다. 결국 1박을 더 하며 거제를 구석구석 누볐다. 예상대로 입원 당일에 병실 미배정 문자가 왔다. 덕분에 진주를 거쳐 산청에서 1박을 추가하며 경상남도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1박 2일로 계획했던 여행을 3박 4일로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입원이 밀렸다. 결국 예정일로부터 5일이나 밀린 25일이 되어서야 겨우 병실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입원 다음날 아침에는 케모포트 시술이 예정되어 있었다. 몸에 흠집 나는 것이 싫어서 주삿바늘로 항암 치료를 받다가 반복되는 혈관염으로 결국 팔뚝에 PICC를 삽입했던 작년의 일이 떠올랐다. 이리저리 잘도 피해 갔던 케모포트 시술을 이제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제대로 된 혈관 주사를 잡기 위해 두세 번은 기본으로 찔렸던 것이 너무 스트레스였기 때문에 케모포트를 통해 두 손 자유롭게 항암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건 좋긴 했다. 


하지만 목덜미에 여린 살을 째고 심장부근까지 링거줄을 집어넣는 시술이 괜찮은 건 전혀 아니었다. 나보다 내 몸을 더 생각해 주던 교수님에게서 먼저 케모포트 얘기가 나왔을 땐 약간 가슴이 철렁하기도 했다. 교수님이 지켜주고자 했던 나의 삶들이 사소한 것 하나하나부터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았다.


다시 이송 침대에 누웠다. 혈관조영실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천장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아무 흉터 없는 목과 쇄골 부분을 계속 만졌다. 작년 첫 수술을 앞두고 아무 상처 없는 커다란 배를 하염없이 만졌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암을 갖고 산다는 건 평범함과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었다.


상의를 벗고 혈관조영실 시술대에 누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알콜솜이 쇄골께를 벅벅 문질렀다. 의사들의 무미건조한 말투와 손길은 신체 일부를 노출한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일어날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간단한 시술 설명과 시작을 알리고는 쇄골과 목 부분에 서너 번 마취 주사를 놓는다.


맨 처음 주사는 악 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아팠다면 갈수록 그 강도는 약해지다 마지막 주사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각사각 소리와 오른쪽 쇄골 가죽을 몸이 흔들릴 정도로 잡아당기는 느낌이 반복되었다. 차라리 수술실이 나았다. 혈관조영실에서는 매번 무서운 일만 벌어진다. PTBD와 PICC 그리고 케모포트까지. 


목 안의 혈관을 타고 링거줄이 꽤 깊이 들어갔는지 심장이 잠시 불규칙하게 쿵쾅거렸다. 시술을 하는 동안 두 명의 의사는 가벼운 사담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웃기도 했다. 이 정도 시술은 대학병원 의사에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의료용 접착제로 마무리된 시술 부분을 절대 만져서는 안된다는 주의사항와 함께 약 15분 간의 시술은 끝이 났다.


시술이 끝나고 병실로 돌아와서도 통증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왠지 마취가 풀리는 순간 엄청난 후폭풍이 몰려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취가 풀려감에 따라 목 주변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아프면 진통제를 처방해 주겠다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날 저녁, 이제 막 인수인계를 마치고 교대한 간호사 선생님이 다가와서 시술부위가 아픈지 확인했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뭐 먹을 때마다 아파요."라고 말하는 내 입은 저녁밥을 맛있게 씹고 있었다.

이전 16화 탈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