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날입니다.
3개월마다 한 번씩 얼굴을 맞대는 자리. 오랜만은 아니지만, 매번 어딘가 낯설고 또 익숙한 그런 모임입니다.
하나 둘 모여 앉아, 어김없이 이야기들이 시작됩니다. 처음엔 건강 이야기지요.
어디가 아프다더라, 무슨 병원에 갔다더니 의사가 어쩌고, 결과가 괜찮다니 다행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이야기는 낡은 뉴스처럼 들립니다. 마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반복될 것 같은 대사들.
술이 한두 순배 돌면 분위기가 바뀝니다. 이번엔 자식 자랑, 손주 자랑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누구네 아들은 뭐가 됐고, 손주는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그림도 잘 그리고, 운동도 잘한답니다.
들으면서 생각하지요. 아, 세상은 참 평화롭구나. 어디 하나 속상한 집안이 없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사실 그래서 싫다는 건 아닙니다.
속내를 털어놓는다고 해서 누가 해결해 줄 것도 아니고, 잘 풀리고 있다고 믿는 말들이 서로에게 위안이 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듣다 보면 슬며시 피로가 밀려옵니다. 어쩌면 이야기 자체보다 그 안의 반복이, 혹은 그 반복 속에서 나만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그런 감정을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웃고, 술잔을 두세 번 돌린 뒤에는 슬쩍 자리를 빠져나옵니다.
"일이 좀 있어서...." 핑계는 늘 준비돼 있습니다.
예전엔 나도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고, 때론 목소리 높여 말하던 때도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 자리가 나를 지치게 한다는 걸.
좋은 예기도 반복되면 지루하고, 칭찬도 과하면 울림을 잃지요.
고래가 춤추는 건 처음 한 두 번이지, 매번 춤만 추면 지쳐버릴 테니까요.
참, 겸손이라는 건 나이 들수록 더 어려워지는 덕목인가 봅니다.
자랑이 나쁘다 할 수는 없지만, 자랑만 남은 대화 속에서 때때로 사람은 공중에 뜬 방패연 같습니다.
잠깐 바람을 잘 타면 높이 올라가지만, 어느새 바람이 멈추면 쓸쓸히 곤두박질치곤 하죠.
그 높이에만 익숙해지면, 착지하는 법을 잊고 마는 겁니다.
퇴직 후 한동안은 이런저런 모임에 빠지지 않고 나갔습니다.
현직 시절 이야기, 앞으로 뭘 할지에 대한 이야기,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들을 나누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 결국 같은 자리, 같은 말, 같은 술잔이더군요.
그래서 하나 둘 줄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손에 꼽을 만큼만 남았습니다.
만나면 좋은 사람이 있고, 만나고 나면 괜히 피곤한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는 나를 살게 하고, 후자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오늘이 그런 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사람에게서 도망쳐 나오는 날.
동창회가 있는 날이면, 왠지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이제는 그 나머지 몇 개의 모임조차 줄여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아무도 탓할 순 없습니다. 다만, 내가 이제 원하는 자리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거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오는 밤길, 어깨가 조금 더 무겁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런 날을 나는 '무기력한 하루'하고 부르기로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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