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010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

기억에 남는 선물이 없는 삶

by 랑세

선물은 받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포장지를 풀어내는 그 짧은 순간의 설렘, 누군가 나를 떠올리며 골랐을 물건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시분이 좋아진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때로 말보다 진하게 전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선물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선물은 진심을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일살에 묻혀 잊히고, 또 어떤 것은 처음부터 의례적이어서 감흥 없이 흘러간다.


돌이켜보면, 나는 선물에 관한 뚜렷한 기억이 별로 없다. 특별히 받았던 것도, 누군가에게 정성껏 준비해 주었던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살아온 환경이 그랬던 것 같다. 선물이란 말은 텔레비전이나 책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고, 우리 집 일상 속엔 그리 낯익은 풍경이 아니었다.


어릴 적, 갖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다. 동화책에서처럼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넣으며 무언가를 사기 위해 차곡차곡 모은다는 상상은, 현생에서는 먼 얘기였다. 가끔 명절에 받은 새배 돈은 기껏해야 과자 몇 봉지, 군것질로 바뀌었고, 그것마저도 친구들과 나눠 먹으면 금세 사라졌다. '갖고 싶다'는 마음보다 '갖지 못한다'는 체념이 더 익숙한 시절이었다.


조금 나이가 들어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용돈이란 것이 딱히 없었고, 어쩌다 손에 쥐게 된 돈은 생필품에 보태는 데 쓰이곤 했다.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한다는 건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내 마음도, 주머니도 그만큼 가벼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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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에게 오래도록 남은 이야기가 있다. 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 나오는 가난한 부부의 선물 교환 이야기, 아내는 남편의 금시계에 시계줄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거기에 맞는 시계줄 사기 위해 길러오던 머리카락을 자르고, 남편은 아내의 탐스러운 머리칼을 장식할 아름다운 머리 빗을 사기 위해 소중한 금시계를 팔아서 빗을 장만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아침, 그들은 서로의 선물을 보고 놀라고 부두 켜 안고 울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서로를 위해 가장 아끼던 것을 내어주는 장면은 마을을 울린다. 이보다 더 진실한 선물이 있을까.


내게도 그런 선물을 주거나 받은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를 위해 나의 무언가를 기꺼이 내어놓은 기억이 있었던가, 떠올려보면 손에 잡히는 기억이 없다. 바쁘게 살아오느라 마음을 건넬 틈도, 받을 여유도 없었다.


어쩌면 그런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 내 삶의 풍경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바쁘게 살아왔다. 경제개발이니 산업화니 하는 말들 속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지 묻지도 못한 채 달리기만 했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말하지만, 빵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다른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세월이었다.


이제와 돌아보니,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아이들도 제 몫을 하고, 내 삶도 조금은 느슨해졌다. 그 여유 속에서 나는 손주들에게 작은 금 쪼가리를 생일 선물로 건네고 있다. 장난감이나 게임기 대신 언젠가 도움이 될지 모를 작은 금 조각 하나, 아이들에게는 재미없고 낯선 선물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미래의 어느 날을 생각하며 조용히 손에 쥐어준다.


그 선물이 그들에게 기억에 남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건 할아버지가 준 거야'라는 짧은 문장 하나로만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로선 충분하다. 그 짧은 기억조차, 삶의 한 조각이 될 테니까.


이제야 선물이란 것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며, 마음보다도 더 귀한 것은 시간을 들여 건네는 진심이다. 값비싼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를 위한 생각이 담긴 행위 자체가 기억을 만든다.


나는 이제 남은 시간 동안, 그런 선물을 주고받고 싶다. 아무 날도 아니어도 좋고,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좋다. 살아 있다는 실감, 누군가를 아낀다는 감정, 함께 있다는 기쁨을 나누는 방법으로서의 선물, 그런 선물 하나쯤, 지금 아라도 내 삶에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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