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리오날공작과의 생활
리오날 알바 아우스트리아 공작.
그는 스페인 펠레페 국왕의 동생이며 프랑스 안느 왕비의 오빠이다.
그는 정략결혼을 한 아내를 잃고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아라미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깊이 마음에 둔 적 있었다. 그러나 아토스와 아라미스의 사랑이 더 크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왕족이라는 신분때문에 아라미스를 정식 아내로는 맞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라미스를 스페인으로 불러와 귀족 후원자(연인과 부부의 중간 정도의 관계)가 되는 대신 아토스의 아내로 잘 살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아라미스가 위험한 상황이고 자신의 곁에 왔다. 리오날은 아라미스를 다시 곁에 둘 수 있다는 마음에 당분간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는 우선 가볍게 사귀던 연인과 결별을 선언하고 짐을 싸서 몬테로 가로 향했다. 몬테로가로 가는 길은 자신의 딸과 대동을 했다.
몬테로가의 정원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 모든 것이 리오날의 관리 덕택이었다. 그는 아라미스가 언젠가 이 저택에 머무를 날을 기대하며 정성껏 집안을 꾸몄던 것이다.
다시 조우한 아라미스와 리오날 공작은 몬테로 저택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9살이 된 리오날의 딸 이사벨라와 이제 갓 5살이 된 라울은 금세 친해져 형제처럼 티격태격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라울은 서툰 스페인어로 대화를 이어가며 이사벨라에게 물었다.
“우리 엄마 이름은 엘렌인데... 왜 이사벨라는 엘레나 부인이라고 불러?”
이사벨라는 그런 라울의 머리를 살짝 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엘렌이 스페인에서는 엘레나라고 부르는 거야, 바보.”
두 아이는 하루 종일 웃고 장난치며 시간을 보냈다. 이사벨라는 유독 아라미스를 잘 따랐다. 아라미스의 만삭의 배를 만져보며 아기 움직임을 느끼고는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오날은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마치 이사벨라, 라울 그리고 뱃속의 아이, 총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라미스도 이사벨라를 보며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과거 리오날의 구애를 받아들여 그의 귀족 후원자의 자리에 머물렀 더라면 자신이 이사벨라의 어머니의 위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없이 자란 이사벨라를 더 따뜻하게 대하며 사랑을 주었다. 라울과 이사벨라를 옆에 앉히고 책을 읽어 주기도 하고 이사벨라의 머리를 빗어주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낮잠에 빠지면 아라미스와 리오날은 저택의 정원이나 산책로를 거닐며 담담히 대화를 나누곤 했다. 아라미스는 아토스에 대한 그리움을 직접 표현하지 않았지만 리오날은 그녀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여기서 아토스와 지낸다면 더 안전할 거예요.” 리오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라미스는 리오날을 가만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저는 그가 오는 날까지 숨죽여 기다릴 뿐이에요."
리오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라미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단순히 당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간 게 아닙니다. 당신이 살아온 삶. 삼총사 시절부터 현재까지 그 모든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라미스의 감정이 요동쳤다. 그녀는 아토스가 자신의 생명만이 아니라 총사대 시절 쌓아온 자신의 명예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아토스야 말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이해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라미스는 속으로 속삭였다.
‘내 명예 따윈 어찌 되어도 괜찮아. 평생 죽은 사람처럼 살아도 괜찮아. 당신만 살아온다면.’
아라미스는 아토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메어졌다.
막달이 되자, 리오날 공작은 아라미스를 더 가까이에서 보살폈다. 그는 아라미스가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을 알아챘다. 그럼에도 아라미스가 그의 다정함을 거부하지 않는 것도 알고 있었다.
리오날은 아라미스의 출산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산파를 미리 대동하고, 필요한 도구와 약품을 철저히 준비하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라미스의 산고가 시작되었다. 리오날은 출산에 대해 경험이 많은 산파와 하인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는 아내의 출산을 기다리는 남편처럼 산실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러나 그에게 곧 아라미스가 난산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몇 년 전 아이를 낳다가 죽은 자신의 아내, 이사벨라의 어머니인 그녀를 떠올렸다. 비록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랑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고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기억은 리오날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리오날은 하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라미스의 산실로 들어갔다.
아라미스는 산고의 고통으로 정신이 흐릿한 상태였다. 리오날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엘레나! 조금만 더 힘내. 제발 나를 위해 힘을 더 내줘. 당신은 견딜 수 있을 거야.”
리오날의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 다정했다. 아라미스는 산고의 고통 속에서 리오날을 아토스로 착각했다.
"아토스......."
아라미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힘을 짜내 출산을 맞이했다.
드디어 아기가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세상에 태어났다. 리오날은 아기를 품에 안았다. 금발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작은 아기였다. 그는 아이를 바라보며 감격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알렉산드라. 넌 알렉산드라라고 부를 거야.” 리오날은 아이를 다정히 안으며 말했다.
"알... 렉산드라. 좋은 이름이에요." 아라미스는 아이의 아버지처럼 딸을 안고있는 리오날을 보며 미소글 지었다.
리오날은 눈물을 삼키며 아기를 조심스럽게 아라미스에게 건넸다. 아라미스는 지친 표정으로 희미하게 눈을 떴지만 딸의 탄생에 기쁨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리오날은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당신과 아이를 지킬게. 아토스가 없더라도... 내가 너희 모두를 지킬 거야.”
그 순간 리오날의 마음속에는 아라미스와 그녀의 아이, 라울과 알렉산드라까지 지켜야 한다는 사명으로 가득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