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날 공작과의 생활
리오날은 아라미스의 산후 회복에 온 정성을 다했다. 마치 사랑하는 부인을 돌보듯 그는 아라미스를 위해 작은 것 하나도 세심하게 챙겼다. 아라미스는 그런 리오날의 모습에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의 배려는 때로 남편인 아토스를 떠올리게 했다. 자신의 남편이 아닌대도 자신을 사랑으로 감싸는 리오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아라미스의 마음속은 뭉클함이 밀려왔다. 리오날은 아라미스의 마음을 읽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동안 나를 아토스처럼 대해도 괜찮아요.”
아라미스는 그의 솔직한 말에 잠시 멈칫했다. 자신을 남편처럼 생각하라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아라미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미스의 몸은 점점 회복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밖을 산책을 할 정도로 기력을 되찾았다. 리오날은 유모를 고용해 아라미스의 아이들과 자신의 딸인 이사벨라를 돌보게 하여 아라미스가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어느 날 아라미스는 리오날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던 중 멀리 정원 안쪽에서 자객 한 명을 발견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자객을 향해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아라미스의 몸놀림은 동물적인 본능으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리오날도 말릴 틈이 없었다. 아라미스는 자신의 빠른 몸놀림으로 자객의 칼을 뺏고 그자의 목에 칼을 갖다 대었다.
리오날은 아라미스의 놀라운 속도에 감탄하면서도 그녀를 말리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그는 아라미스의 칼날 아래 무릎을 꿇은 자객의 얼굴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아라미스가 잡고 있던 칼을 조용히 자신의 손으로 가져왔다.
"여기서 지금 본 것은 그 어떤 것도 발설하지 마라. "
리오날은 자객에게 당부한 후 놀랍게도 그자를 그냥 돌려보냈다.
“왜 그냥 돌려보내는 거죠?” 아라미스는 리오날의 태도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리오날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 자객은 그나마 믿을만한 사람이에요."
리오날은 자신의 행동에 놀라는 아라미스를 향해 대답했다.
“스페인 펠리페 국왕이 보낸 사람이에요. 나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감시하려고 보낸 거죠.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닙니다. 내가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키울수록 형님의 견제는 계속될 겁니다.”
아라미스는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리오날 공작이 형인 펠레페 국왕보다 실력은 물론 외모, 인품까지 더 뛰어나다는 소문은 예전부터 쭉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국왕인 형이 공작 위치에 있는 동생을 질투하다니. 권력 다툼 속에서 리오날이 얼마나 고립감을 느꼈을지 아라미스는 절실히 깨달았다.
리오날은 씁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권력에는 형제도 친구도 없어요. 그래서 순수한 인연으로 이어진 엘레나 당신과 아토스가 내게는 무엇보다 소중해요.”
아라미스는 그를 이해하고 마음을 위로하듯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라미스의 손길에 리오날은 고개를 돌렸고 그들은 잠시나마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수년 전, 그들은 리오날의 영지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냈던 적 있었다. 남장을 했던 아라미스와 그 모습조차 아름답다고 말하던 리오날. 그날 아라미스는 리오날의 따뜻함과 다정함에 녹아 그에게 마음이 흔들렸었다. 그들은 순수하게 남자와 여자로 하룻밤을 보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서로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들은 당시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관계는 전과는 전혀 달랐다.
리오날은 자신을 쳐다보는 아라미스의 얼굴에 깃든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보며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느꼈다. 그는 허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둘은 아토스를 두고 친구처럼 지내고 있지만 사실 서로의 감정을 알고 있지 않나요?”
리오날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섞여 있었다.
“아토스는 내 영혼의 친구죠. 내가 얼마나 친구로 아토스를 얼마나 존경하고 아끼는지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아라미스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감정은 단순한 동료애나 우정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건 아토스와 나의 운명이었나 봐요. 하지만... 당신은 항상 아토스만 걱정하죠.”
리오날은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아라미스는 그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아토스는 당신을 정말로 신뢰하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고요. 당신이 나의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죽었을 거예요.”
그들은 한참을 그렇게 서로 바라보았다.
며칠 후 아라미스는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아토스를 극찬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아토스의 제안에 따른 전술들이 전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했다. 그러나 스웨덴은 스페인의 적국이었다. 아라미스는 아토스가 무사하다는 소식에 안도하면서도 리오날의 조국 스페인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라미스는 리오날의 곁에서 그의 마음을 위로하며 앞으로의 서로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리오날과 아라미스는 늦가을 저녁,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때, 리오날의 전령이 몬테로 가로 말을 타고 달려왔다. 전령은 스웨덴 전장에서의 소식이 전해왔다.
그들은 전령의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스웨덴의 아돌프 국왕이 전투 중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전투는 승리했지만 전장을 이끄는 스웨덴국왕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아돌프 국왕과 가까웠던 아토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남았을까? 아니면 전장에서 함께...?
아라미스는 리오날에게 불안한 마음을 전했다. “아토스가... 만약..."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리오날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토스는 쉽게 쓰러질 사람이 아니에요. 알잖아요. 그는 분명히 살아서 우리에게 돌아올 거예요.”
그러나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의 고립감과 외로움은 사람의 정신을 서서히 갉아먹는다는 것을. 리오날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토스는 강하지만... 그도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당신과 라울 그리고 태어난 아기를 생각하면서 버틸 거예요.”
아라미스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토스가 반드시 살아 돌아오길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무사히 돌아와. 당신의 명예도... 목숨도 무사하길......’
리오날은 기도하는 아라미스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기도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참 답답하군요.”
‘아토스, 살아서만 돌아와. 당신이 살아서 돌아오면... 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 아라미스는 다시 눈을 감고 다짐했다.
한밤 중, 아라미스는 꿈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적들이 자신을 공격했고 필사적으로 아토스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숨이 가빠지며 정신을 차린 아라미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옆 침대에는 라울이 평온히 자고 있었고 요람에서는 알렉산드라가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아라미스는 얇은 숄을 걸치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 밖에는 달빛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빌었다. "제발, 무사히 돌아와..."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아토스의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알렉산드라는 태어난 지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다. 스웨덴 군도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아토스의 소식은 여전히 없었다. 아라미스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식사도 거의 하지 않아 점점 말라갔다. 아라미스의 상태를 걱정한 리오날은 그녀를 대신해 라울과 알렉산드라를 돌보며 지냈다.
어느 밤 아라미스는 잠이 오지 않아 정원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리는 무겁고 마음은 텅 빈 듯했다.
그때, 저 멀리서 빠른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아라미의 마음은 긴장감으로 두근거렸다.
"혹시 나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인가?"라는 생각이 들자 심장 박동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라미스는 조심스럽게 테라스로 나와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익숙한 그림자. 말을 세운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남루한 긴 망토를 입고 있었다.
"아토스?"
아라미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속삭였다.
"내가 돌아왔다. 아라미스."
아라미스는 그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 순간 모든 불안과 고통을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