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로 추억하기

by 랜덤초이

사람들은 과거의 일을 기억할 때 특정한 음악이나 음식이 트리거가 되어 옛일을 떠올릴 때가 있다.

길을 걷다가 또는 카페에서 우연히 듣는 음악이 나의 추억을 건드리기도 하고, 특정한 음식을 앞에 두면 그 음식을 즐겨먹던 때의 추억이 떠오르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기억나기도 하는 그런 류의 연상작용 말이다.


나에게는 유독 햄버거와 관련한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국내에서 태어나서 쭈욱 자란 사람으로서 한식이 아닌 햄버거에 관해 특별히 많은 기억이 남은 것이 특이하기도 하지만, 한 번쯤 그 기억들을 정리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 내가 기억하는 햄버거의 추억을 기억의 순서에 따라 정리해 보았다.


내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첫 햄버거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입점해 있던 '아메리카나 햄버거'다.

초등학교(국민학교) 저학년 때, 우리 식구들은 주말이면 가끔 온 가족이 서초동에서 광화문까지 좌석버스를 타고 가서 교보문고에 들러 책 한 권씩을 고른 후 햄버거를 먹고 귀가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거 없는 일상이지만 당시엔 그런 간단한 외출이 가족의 문화생활이고 외식이었다.

마치 대부분의 사람이 기억하는 대중목욕탕 이후의 '바나나맛 우유'처럼 책을 사고는 햄버거를 먹는다는 건 당시의 루틴 같은 것이었다.

김도향 가수의 TV CM송으로도 기억되는 '아메리카나 햄버거'는 어느새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브랜드가 되었지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아직도 몇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는데 한 번쯤 그 추억의 맛을 느낄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딱 한 번 경험해보았지만 미군 군무원으로 일하시던 분의 초청을 받아 당시 '미 8군 기지'에서 먹었던 햄버거 맛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노란 머스터드소스와 피클이 들어간 육향 가득한 기름진 패티는 그때까지 알고 있던 햄버거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고, 이런 게 진짜 미국 햄버거의 맛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먹었었다.

당시에 느낀 색다른 입맛이 너무 강렬하여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있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면 입안에서 다시 그 맛이 느껴질 정도의 인상이 남아있다.


그다음 시대에는 강남역 '뉴욕제과 햄버거'가 기억에 남는다.

어머니께서 일을 보러 외출했다가 오실 때는 가끔 강남역 뉴욕제과 2층에서 파는 햄버거를 사 가지고 오셨다. 붉은빛이 도는 네모난 포장 박스는 반으로 나뉘어 한쪽에는 이등분된 햄버거가, 다른 한쪽엔 빨간 미트소스 스파게티가 담겨 있었다.

햄버거 패티는 마치 한식 동그랑땡 같은 맛의 패티로 만들어져서 그다지 선호하는 맛이 아니었지만 스파게티와의 조화가 훌륭해서 나이 들수록 다시 생각나는 맛이었다.


그 후로 한동안 내가 살던 지역에선 여러 햄버거 브랜드가 각축하여 경쟁하던 시절이 있었다.

다양한 햄버거 브랜드 중에서도 몇몇 브랜드가 특히 기억에 남는데, 우선 빵이 핫도그처럼 긴 모양이었던 '훼미리 버거'는 입에 넣기가 편해서 자주 먹었다.

'버거 잭 햄버거'는 딱히 특징이 기억에 남지 않지만 가장 무난한 맛이었다.

'죠 아저씨 버거'에는 독특한 김치버거를 만들어서 팔았었기에 가끔씩 볶음김치가 들어간 색다른 맛을 찾아 사 먹었던 기억이 있다.


90년대 초를 전후해 기술제휴 방식이나 고유 브랜드로 성장한 햄버거와 달리 미국 햄버거 브랜드가 본격 진출하면서 더 다양한 햄버거를 즐길 수 있었다. 압구정동 '맥도널드'와 삼성역 광장 '웬디스 버거'는 당시 젊은 학생들이 즐겨 찾는 장소였고 휴대폰과 삐삐도 없던 시절 대표적인 약속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때부터는 롯데리아와 맥도널드처럼 자본력이 있는 회사가 프랜차이즈를 확장하면서 기타의 다른 군소 햄버거 브랜드들이 정리되어 가던 시절이었다.


'진짜 사나이' 같은 TV 예능프로그램에서는 군대에서 먹는 햄버거를 군대리아라고 칭하며 맛있다고들 난리지만 나에게 군대에서 먹었던 햄버거는 일생 경험한 햄버거 중 최악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햄버거 패티에 딸기잼을 발라먹는다는 것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갔을뿐더러 스팀으로 데운 축축한 햄버거 빵에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닭목과 뼈까지 갈아 만든다고 소문났던 패티는 식욕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강남역 중앙종금 빌딩 옆엔 '진솔 문고'라는 대형서점이 있었고,

그곳에는 당시 유행했던 '하디스 햄버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버거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프리스코 버거'라고 버터에 구운 둥근 식빵 사이에 두툼한 패티 그리고 치즈가 녹아있는 버거는 지금도 다시 생각나는 메뉴이다.

너무도 기름진 번과 패티에 잔뜩 달라붙은 진득한 치즈의 맛으로 하나만 먹어도 포만감이 가득 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침 대형 서점에 입점한 프랜차이즈 햄버거라는 점 때문에 유년 시절에 경험한 '아메리카나 햄버거' 기분을 낼 수 있었기에 더욱 즐겨 방문하게 되던 곳이었다.


IMF 사태 이후로 많은 햄버거 브랜드가 정리되고 철수하면서, 살아남은 '롯데리아', '맥도널드', '버거킹' 등 몇몇 대형 햄버거 프랜차이즈 말고는 한동안 새로운 프랜차이즈를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수제버거 타이틀로 인기를 끌었던 '크라제 버거'가 새로운 신흥 강자로 떠오르나 했지만, 홈쇼핑에서 함박스테이크 패티를 팔면서 사업을 확장하는 듯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보기 힘든 브랜드가 되어버렸다.


그 후로는 이렇다 할 새로운 햄버거 프랜차이즈는 볼 수 없었다.

간혹 어는 지역에서 수제 햄버거로 이름 날렸다는 몇몇 햄버거 가게가 있었지만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기업형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출현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의 새로운 햄버거 맛에 대한 호기심은 해외 출장지에서도 이어졌다. 일본에 여행 갔을 땐 국내 진출 전의 모스버거를 찾아 먹어 보고, 미국 라스베이거스 출장을 갔을 땐 동료들과 '인 앤 아웃 버거'를 먹어보겠다고 밤거리를 걸어 헤매 보고, 샌프란시스코 출장을 갔을 땐 공항 안에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레스토랑의 '그릴드 버거'를 먹고 감동하기도 했었다.


뉴욕에 갈 일이 없어 포기할 뻔한 '셰이크 쉑 버거'가 처음 강남역에 론칭했을 땐 추운 길거리에 30분 이상 기다리며 버거를 먹어볼 정도로 아마도 나는 햄버거에 대해 뭔가 집착이 있는 것 같다.


서너 개 햄버거 브랜드에 대한 추억을 써보려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니 어느새 십여 개가 훌쩍 넘는 버거의 추억이 떠오르고, 그 와중에 또 아직 맛보지 못한 고든 램지 버거엔 언제 가보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아마도 나는 냉면성애자로 불리는 존박처럼 버거성애자의 기질이 잠재되어 있는가 보다.


세상은 넓고 햄버거는 다양하다.

앞으로 또 얼마나 새로운 햄버거가 내 인생의 추억으로 남게 될 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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