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나 유튜브를 보다 보면 뜻을 알기 어려운 줄임말을 흔하게 듣게 된다. 심지어 "별 걸 다 줄여서 말한다."라는 말도 '별다줄'이라고 얘기하는 걸 보면 참 대단들 하다는 생각이 든다.
줄임말은 나이 어린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취급받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줄임말 즉 약어(略語)는 기성세대의 언어 속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고, 직종과 직장에 따라서도 다양한 그들만의 약어 단어를 가지고 있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정말 무수히 많은 약어(略語)를 경험하곤 했다.
본딧말 단어로만 표기해서 이용하려면 문장이 워낙 길어지게 되므로 편의 상 단어의 첫 글자만 표기해서 약어로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로 된 단어들의 조합을 첫 문자로 줄여서 주로 사용하지만 한글로 된 단어들의 조합도 줄여서 약어로 쓰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복수(複數)의 단어 조합을 줄여서 약어로 사용하면 표현이 간결해지고 짧은 약어로도 복잡한 개념을 함축해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면이 크지만, 줄임말로 만드는 과정에서 다른 의미의 약어와 혼동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 해당 약어 사용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의 전달이 불가능한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내가 사원이었던 한참 오래전에 IR행사 차 홍콩으로 출장 가있던 같은 팀의 차장님으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국제전화 요금이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웬만한 일이라면 굳이 전화가 올 리가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전화로 도움 요청을 받게 되자 마음이 급해졌었다.
요청 내용인즉슨 투자자들에게 회사를 소개하는 자료 중 ‘IS MS’라는 약어가 있는데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으니 정확하게 확인해 달라는 용건이었다.
'IS MS'라는 약어만 전달받은 체 무턱대고 그 뜻을 확인하려니 팀의 주니어들이 바빠졌다.
한 명은 문서를 생성한 부서가 어디인지 찾아 작성자에게 물어보기 위해 담당자를 찾으러 뛰어나갔고, 나는 온갖 전문 용어 사전과 당시의 대표적인 검색 엔진이었던 알타비스타와 야후를 뒤졌다.
(놀랍겠지만 그때만 해도 네이버와 구글은 신뢰성 있는 주류의 검색엔진이 아니었다.)
당시 사전에서는 'IS MS'를 찾을 수 없었고, 기껏 인터넷에서 검색한 정보도 'Illinois State Medical Society', 'International Symposium on Molecular Spectroscopy' 같은 내용이어서 회사 업무와의 연관성을 추정할 수 없었다.
한동안 답답한 시간이 흘러 원래의 내용을 정리한 담당자를 찾고 나서야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었는데, ‘I SMS’ 즉, ‘Interactive Short Message Service’의 약자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의미를 알고 나니 사실 좀 허탈한 마음도 들어서 당시 약어의 의미를 찾으려 함께 고생한 직원들끼리 얘기했다.
“아니, I (pause) SMS라고만 발음하셔도 이렇게 고생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차장님은 왜 IS (pause) MS라고 읽으셔서 우릴 이렇게 헷갈리게 하신 거지?’” 하며 투덜댔던 기억이 난다.
마치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처럼 말이다.
자동차 회사에 근무할 때, 상품계획 보고서에는 ‘FMC’라는 약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나에게 익숙한 정보통신 사업의 영역에서 'FMC'는 ‘Fixed Mobile Convergence’ 즉, ‘유무선 통신의 융합’을 뜻하는 용어였다.
의외의 장소에서 낯익은 약어를 보고 잠깐 반가웠지만 자동차 사업에서 'FMC'는 ‘Full Model Change’ 즉, 특정 자동차 모델의 전체적인 플랫폼이 교체되는 완전한 세대교체를 뜻하는 용어로 쓰인다는 것을 알고는 약어의 혼동이 머쓱했었다.
특정한 약어가 서로 다른 산업 영역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는 꽤 많아서 'TPS'라는 단어 역시 정보통신 산업에서는 ‘Triple Play Service’ 즉 ‘하나의 네트워크(or 사업자)로 인터넷, 전화, TV의 세 가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하지만, 자동차 산업에서는 ‘Toyota Production System’ 즉 ‘도요타 생산방식’을 일컫는 약어로 쓰이고 있었다.
내가 경험한 약어 중에서는 미처 그 의미를 상상하기 힘들었던 단어들도 있었는데, HJN / BHJN / SJN 같은 약어 단어는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약어 중 가장 뜻을 추측이 어려운 약어였다.
사실 그 의미는 회장님 / 부회장님 / 사장님 같은 직함의 약어였는데, '별로 길지도 않은 한글 단어를 왜 줄여서 쓸까', '왜 한글 발음을 영어 약자로 줄여서 적을까', '왜 약어에 님을 꼭 붙여야 하는가' 등 여러 가지 호기심이 생기게 만들었던 표현이었다.
어느 집단의 역사 속에서 암묵적 합의에 의해 일반명사처럼 통용되는 약어들이 존재한다면 처음 집단에 소속되게 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약어의 존재는 진입 장벽이 되기도 한다.
새로운 전입자는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어려움을 겪지만 집단 내에서 쓰이는 약어의 의미를 많이 알아갈수록 해당 집단 내에서의 소통에 익숙해지고 동질감이 형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해당 조직에 새로 전입한 사람이 조직의 수장(首長)인 경우라면 얘기가 좀 다를 수 있다.
어떤 수장들은 해당 조직에서 통용되는 일반명사화된 약어를 스스로 익히고 배우지만, 어떤 사람은 본인의 기준으로 해당 약어를 고치려 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경험으로 보자면 대부분의 그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특정 집단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용어를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바꾸려는 시도는 잠시 동안은 가능한 것처럼 변하지만 다시 원래의 자리로 회귀하여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건 변화가 불필요해서라기 보다는 변화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있기 전에 조직의 수장이 또 다른 수장으로 교체되면서 변화의 동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만큼이나 조직과 또래 등 집단 안에 형성된 언어 습관은 고치기가 힘들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별 것 아니게 남들도 당연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무에게나 사용하는 어떤 줄임말이나 약어는 그들과의 소통에 허들이 되는 경우가 분명히 존재한다.
요즘 즐겨보는 TV 예능 프로그램 중에 '강철부대 2'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전 시즌의 흥행으로 두 번째 시즌이 시작된 프로그램은 대한민국의 특수부대 전역자들이 부대별 팀 대결을 거쳐 최고의 부대를 가리는 팀 서바이벌 예능인데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니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TV에서 방영되는 본방에는 김성주, 김희철 등 익숙한 예능인들이 패널로 스튜디오에 나와 녹화된 특수부대들의 대결을 함께 감상하는데, 본방이 끝나면 곧 유튜브에서 시즌1에 출연했던 특수부대 전역자들이 패널로 나와 같은 대결 장면을 해설해주는 '박갈량의 강철부대2 Remaster'를 보여주는 구조였다.
프로그램의 내용 상 특수부대의 전술과 장비, 무기 등에 대한 군대 용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본방에서는 그런 내용에 대한 해설은 최소화하고 참가자들의 승부와 경쟁에 중점을 두어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유튜브 리마스터에서는 전문적인 전술과 용어에 대한 해설이 함께 제공되는 구조였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어서 어쩌다 보니 두 가지 버전의 방송을 모두 보게 되면서, 나는 특정 집단의 전문용어와 약어가 이용되는 경우 이를 남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 지를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우선 약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동일 집단 내에서라면 그들이 만들어 온 언어 습관이 그들의 생활 속에서 최적화되어 진화된 것이니 바깥의 사람들은 가급적 존중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었다. 그 언어 생태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특정 집단 내부의 소통수단을 제단 하려 든다면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비효율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점에서의 생각이다.
그러나 약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소통하려면 충분한 설명과 소통의 노력을 함께 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게 되었다. 리마스터 버전의 방송에서 소개해주는 상황과 약어의 해설이 같은 대결 장면에서도 더 많은 이해를 만들어내니 말이다.
결국 소통의 본질은 상대와 나의 생각을 정확하게 교환하고 이해해야 하는 일이므로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하고 필요한 부가설명을 더 해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사춘기 우리 막내도 아빠를 보면 "어쩔티비"라고 한마디 던지기보다 "아빠 저를 내버려 두시고 방에 가셔서 TV를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친절히 얘기해주면 나도 더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