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라도 어떠한가

by 랜덤초이


"딸을 낳으면 비행기 타고, 아들을 낳으면 버스 탄다"라는 말이 있다.

출가한 자식 중 아들보다는 딸이 부모님께 더 잘해드린다는 속설에서 나온 말이다.


아들인 나로서는 저런 말에 대해서 당당하게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 나의 경우 저런 이야기를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여동생은 벌써 몇 번이나 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다녀왔지만 나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총 8년의 터울을 갖고 아이 셋을 낳아서 키우다 보니 어린아이가 있는 동안 가족 여행에 어려움이 있었고, 아이들이 커가면서는 초-중-고등학교-이제는 대학교까지의 학사 일정과 학원 스케줄까지 모두 고려해야 하는 관계로 시간을 맞추기도 어려웠었다.

그리고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우리 다섯 식구와 부모님까지 함께 해외여행을 가려면 기둥뿌리 하나쯤 뽑아야 하는 경제적 이유가 가장 부담이 되었다.


살면서 그런 부분이 적잖이 마음에 걸리던 차에 나로서는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는 대안을 찾았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은 꼭 해외여행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꼭 가족 전체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시간이 되는대로 혼자서라도 부모님을 모시고 당일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게 굳이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서 연례행사 치르듯 해야 한다는 법도 없는데 그동안의 소홀함이 후회되었고, 시간이 되는 대로 못 가본 지역을 방문해 보면 재밌고 의미있겠다 싶어서였다.

길이 막혀서 길에서 애먼 시간을 소모하게 되거나 운전의 피로가 쌓이는 걸 피하고자, 여행은 되도록이면 우등 버스로 이동할 수 있는 지방 소도시를 타깃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처음 시작한 여행의 목적지는 전라북도 군산이었다. 그리고 군산은 부모님과 함께 들러본 곳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 중 한 곳이 되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도시인만큼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부하고 관광 명소들이 많았으며, 대부분 명소가 걸어서 접근이 가능한 거리에 있어서 편하게 둘러본 기억이 남는다.


경상북도 안동의 경우엔 생각했던 것보다 그 면적이 엄청나게 넓어서 관광지 간 이동에 시간이 좀 걸렸었다. 그래도 과거로 타임슬립 한 것 같은 하회마을과 풍경 좋은 월영교 주변은 여행의 여독을 해소해주는 멋이 있었고, 히트곡의 배경이 된 안동역 앞에선 맛있는 안동 갈비를 경험할 수 있었다.

여행을 따라나선 막내아들 덕에 부모님과 넷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언제가는 출발 몇십분 전에야 부모님께 급하게 강원도 여행에 동행을 제안한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내가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을 겪고 기분을 풀려고 하루 휴가를 내어 동해 바다를 보러 가려 할 때였다. 친구 중의 누구라도 시간이 맞으면 같이 바다도 보고 회도 먹어야지 생각했지만 평일에 그것도 당일 아침에 찾아보려니 시간을 낼 친구는 찾기 어려웠다.


그때 생각해보니 이럴 때도 오히려 부모님께 연락드려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평일 아침 갑자기 연락한 아들의 전화에 부모님은 흔쾌히 함께 길을 나서 주셨다.

오대산 월정사와 속초 외옹치 해변을 돌아오는 동안 부모님께는 회사에서 있었던 답답한 일을 말씀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선 눈치껏 분위기를 살피신 것인지 '고생한다.', '잘하고 있다'며 나에게 연신 좋은 말씀을 해주셨고, 나 역시 좋은 풍경과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밝게 웃으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답답한 마음도 풀리고 그동안 나의 소홀했던 부분도 조금은 해소되는 것 같았다.


코로나로 인한 모임 규제가 심화되고 부모님도 더 연로해지시면서 버스로 이동하는 소도시 여행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찾아보니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 분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부모님과 함께 할 만한 멋진 풍광을 가진 명소는 많이 있었다. 가까운 거리라면 자동차로 움직여도 부담이 없고 오히려 부모님을 편하게 모실 수 있는 점도 장점이 되었다.


한창 코로나 집콕으로 무료할 적에 찾아갔던 안산의 탄도항은 멋진 석양과 갈매기 떼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풍력발전소가 이국적인 바다 뷰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었다.


집에서 더 가까운 경기도 수원 화성의 경우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같이 엽서에서나 볼 법한 운치 있는 풍경을 즐길 수도 있었다. 화홍문 앞엔 수원의 자랑인 갈비를 맛볼 수 있는 식당도 있었는데 아들 녀석은 안동에 이어 갈비로 유명한 곳에 갈 때엔 사춘기 반항심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집 밖에 잘 나서는 걸 보면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 싶은 기분도 들었다.


수원의 광교에는 잘 정비된 호수공원이 있어서 데크 길을 따라 산책을 할 수도 있다.

호변이라 길은 평탄하고 편의시설도 잘 되어 있어서 연로하신 부모님과 함께 걷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는 곳이다.


사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여행을 거창하게 생각하면 계획만 하다가 어그러지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쉽게 생각해서 가볍게 움직이면 일상 속에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을 보내는게 가능하다는 것도 경험할 수 있었다. 부모님 역시 생각지도 않은 일정에 짧은 이동으로도 좋은 풍광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 많이 만족해하시는 눈치였다.


많이 걷고 움직이는 것을 점점 불편해 하시는 게 느껴져서 더 좋은 곳을 그 동안 많이 모시고 가지 못했던 게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회만 되면 적게 걷고 잠시 걷더라도 부모님과의 이런 외출을 자주 갖고 싶다.


어릴 때 생각으로 부모님은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고 모든 일에 정답을 알고 계실 것 같았지만 이제보니 그분들도 나처럼 그냥 나이를 드셨을 뿐 나보다 더 어른이어야 되는 책임과 의무를 가진 분들은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아이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겠지만, 살다보니 살아 내다보니 사는 것일 뿐 거창한 빅 픽쳐나 플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냥 현실에 적응하고 저항하며 살아가는게 아닌가 싶다.

어르신들은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훌륭히 버텨서 지금에 이른 것일까 생각하니 한편 존경스럽고 한편으론 그들이 겪어오셨을 내게 알려주지 않으셨고 그래서 알지 못하는 힘들었을 경험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버스' 이건 '비행기' 이건 아무튼 부모님과 함께 할 기회는 미뤄두지 말고 자주 가져야겠다.

소소했던 여행의 경험도 소중하게 기억하고 추억하시는 부모님을 볼 때면 더욱 그래야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줄임말, 소통의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