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武俠)에 반하다

by 랜덤초이

무협소설(武俠小說)을 참 좋아한다.


사실 무협(武俠)이란 장르를 전혀 모르던 때에도 나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대하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다.

'삼국지(三國志)''초한지(楚漢志)' 등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역사 속 영웅들의 활약상을 읽고, 생활 속에 익숙한 고사성어가 처음 생겨난 배경을 알아가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중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다른 외국 소설에 비해 읽기 쉬웠던 건 등장인물의 이름이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과 같은 방식으로 읽혔기 때문인 이유도 크다.

정말 훌륭한 유명 문학 작품이라지만 러시아 대문호의 소설을 읽을 때는 등장인물의 이름 때문에 책 읽기가 참 힘들었다.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드미트리 프로코피이치 브라주미힌',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마르멜라도바' 등등 …

몇 페이지 넘기다가도 “이 이름이 누구더라…?” 하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렇게 독서의 흐름이 끊어지는 건 어린 학생이 넘기 힘든 허들이었다.


어느 러시아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이 죄다 ‘이반(Ivan)’이었는데, 또 어떤 러시아 명작 소설 속 이름들은 왜 그렇게 어려운 건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반면 중국 역사소설의 주인공은 항우, 유방, 유비, 관우, 장비, 조조 등등 … 얼마나 읽고 기억하기 쉬운가 싶었다.


그렇게 삼국지처럼 역사 속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에 심취하여 박종화, 정비석, 이문열 등 여러 작가가 쓴 버전을 다양하게 접하던 중에 '김용(金庸)'‘영웅문(英雄門)’이란 작품을 알게 되었다.

그때가 그동안 읽어봤던 역사소설과 다른 무협소설 장르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영웅문 1부의 주인공인 곽정, 황용의 성장 서사와 매력적인 캐릭터들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중신통 등 천하오절들의 관계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항룡십팔장, 합마공, 일양지, 쌍수호박 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공 들까지...


기존에 읽던 역사 소설과는 많은 부분에 차이가 있었지만 실제의 역사와 달리 마지막에 반드시 갈등이 해소되고 주인공이 권선징악을 실현하는 모습은 실제 역사에 비해서 오히려 더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전해주었다.


'무협소설'을 국어사전(네이버)에서 찾아보면 '무술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협객(俠客)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라고 한다.

이때 '협객(俠客)'은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데 한자 '협(俠)'

1. 의기롭다

2. 호협하다(豪俠--: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다) 등의 뜻을 같는다.


소설 장르의 정의(定義)에서조차 정의(正義)로운 사람의 이야기란 뜻을 표방하고 있으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말이다.


정의(正義)로운 결과로 마무리되지 않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게 되면 그 답답한 마음이 현실의 기분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서는 정의로운 사람이 인정받고 성공하는 모습을 보기 힘든 까닭에 더욱 무협의 세계에 정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협소설이 가진 전형적인 구성과 정해진 결말이 식상하다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여전히 무협소설을 사랑한다. 특히 어쩌다가 우연히 주인공이 '무공비급(武功祕笈)'을 얻는 등 기연(奇緣)으로 절세의 고수가 되는 그런 내용보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노력하여 실력을 갖추고 의로움을 실현하는 줄거리를 좋아한다.


용대운 작가가 쓴 '마검패검', '철혈도', '태극문', '독보건곤'은 나의 최애 소설이다.

지금까지도 생각날 때마다 가끔 찾아 읽고 사서 읽게 되는 명작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용대운 작가가 20년도 더 전에 집필을 시작한 '군림천하'를 아직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기다리는 독자들의 마음도 그렇지만 정작 작가 역시 본인의 마음을 갈아 넣고 있는 작품이 완성되지 못하고 있는 게 얼마나 불편할까 싶다. 모쪼록 용대운 작가가 창작의 괴로움을 이겨내서, 종남의 진산월이 오욕의 과거를 이겨내고 언제가 군림천하 하는 결말을 꼭 볼 수 있기를 오매불망 기다린다.


상상 속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이대로 소설의 끝을 보지 못한다면 종남파와 진산월에게 너무 가혹한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수없이 독자제현의 건승을 빌어온 용작가께서 건승하시어 더 많은 사람들이 무협의 매력에 빠져 의협심이 충만한 사회가 되어가길 바래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