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엔 참고서나 문제집 따위의 보조 교재를 사야 할 일이 많았다.
권당 5천 원 내외의 가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보통은 부모님께 그냥 “만원만 주세요.”라고 얘기하고 돈을 받았다.
참고서를 산 후 남는 돈으로는 '드래곤볼', '시티헌터' 나 '공작왕' 등 당시 유행했던 500원짜리 해적판 만화책을 몇 권 사서 읽고, 학교 근처 분식집에서 라면이나 떡볶이를 사 먹었다.
거스름돈이 있어도 부모님께 돌려드리지 않았고, 부모님 역시 문제집 사고서 돈이 남으면 뭐라도 사 먹고 다니라고 하시는 경우가 많았기에 묵시적으로 용인된 현금 유용인 셈이었다.
하지만 직장 생활과 같은 공적인 관계에서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건 엄밀히 따지자면 "횡령"이 된다.
회사에서 사무용으로 구입한 볼펜이 예쁘다고 집에 가져가거나, 커피믹스 같은 물품을 집에 들고 가서 쓰는 사소해 보이는 일도 원칙적으로는 그런 사례가 된다.
회사마다의 문화와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어떤 회사들은 집에 갈 때 회사 식당에서 도시락을 싸가거나 공금으로 구입한 도서를 사적으로 소유하는 걸 허용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전에 제도적으로 합의되어 용인되는 범위를 벗어나면, 위와 같이 사소해 보이는 일도 일종의 횡령이라고 볼 수 있다.
조직과 개인 간의 관계가 좋을 때에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평소 문제없어 보이는 일들도 가혹할 정도로 냉정하게 판단받을 수도 있다.
올 들어 여러 기업에서 연달아 터진 내부 직원에 의한 횡령 사고로 인해 세상이 시끄러웠다.
횡령 액수도 수백만 원이나 수천만 원 수준이 아니라 대부분 억대에 이르고, 많게는 수천억 원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소식을 접했을 때 회사의 동료들과 "그 사람 간덩이도 크다.", "어휴 저런 나쁜 놈", "저런 녀석은 콩밥 좀 먹어야지"하는 말들을 주고받곤 했었다.
그런데 요즘에 직장인들의 익명 게시판을 보면 사람들은 범법에 분노하기보다 횡령 방법을 궁금해하고 오죽하면 횡령했겠냐 하며 동조하거나 심지어 횡령이란 범법을 저지른 사람을 무슨 로빈훗 같은 의적이라도 되는 듯 표현된 글들도 보인다.
물론 진심이 아니라 냉소적인 감정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사람들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경우가 있다고 치더라도 과거보다는 불의(不義)에 대해 둔감한 표현이 많아졌다고 느껴진다.
어쩌다가 조직에서는 명백한 불의에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걸까?
생각해보면 그런 마음을 갖는 이유는 그보다 더한 나쁜 사람들이 있거나 횡령의 배경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인 경우가 많다.
기업의 내부 통제를 무력화할 수 있는 사람이 벌인 일에는 관대했던 그동안의 전례들도 그런 생각에 영향을 줬을 수 있고, 성과를 조작하기 위해 관행적으로 활용되었던 편법들 때문에 저런 횡령 사고가 나더라도 그럴 수 있지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의(不義)한 일은 큰 일이던 작은 일이던 불의한 것이고, 불의한 일처리를 한 사람이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에 둔감해지면 그런 불의한 행동은 전염되듯 퍼져나간다.
당연히 그럴 것이 편법과 불의를 활용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익을 보고 정상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피해를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편법과 불의에 동참하고 묵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는 '그리샴의 법칙'은 화폐뿐 아니라 조직문화에도 통용되는 것 같다.
소재의 가치가 서로 다른 화폐가 동일한 명목가치를 가진 화폐로 통용되면 소재가치가 높은 화폐(Good Money)는 유통시장에서 사라지고 소재가치가 낮은 화폐(Bad Money)만 유통되는 현상처럼, 편법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이 묵인되는 조직에서 사람들은 굳이 정직하게 일해야 할 필요를 잃어가게 되니 말이다.
때문에 조직이 그리고 사회가 건강하려면 신상필벌(信賞必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신상필벌이 작동되지 않는 조직에선 작은 불의(不義)부터 쉽게 물들게 되고,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더 큰 불의(不義)한 일도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순자(荀子)의 글은 이런 생각을 명쾌하게 전달한다.
賞不行則 賢者不可得而進也 상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으면 어진 사람이 나오지 않고
罰不行則 不肖者不可得而退也 형벌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으면 나쁜 자를 물러나게 할 수 없다.
- 순자(荀子) 부국(富國) -
그리고 삼국지의 영웅인 유비가 남긴 말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선악을 판단하여 임하라고 가르친다.
勿以惡小而爲之, 勿以善小而不爲
나쁜 일이 작은 일이라고 하여 행하면 안 되고, 착한 일이 작은 일이라고 하여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명심보감(明心寶鑑) 계선(繼善) -
어릴 적 보았던 옛 성현의 글들을 나이 들어 어른이 된 지금 다시 되새겨 보게 되면
지금의 사회현상에 비추어 당시의 문제 의식을 느낄 수 있고, 그런 뜻을 남긴 그들의 주장이 당시 얼마나 절실한 마음으로 표현되었을지를 헤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