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아쉽다

by 랜덤초이

나는 매출이 전혀 없는 신설 회사에 입사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기업에 매출이 없다는 것의 의미가 뭔지도 모를 정도로 생초짜 직장인이었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살다가 어느 날 매출 없는 회사를 바라보는 사회의 냉정한 시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입사 후 두 달쯤 지나 대학교 졸업식에 참석 차 모교를 방문했을 때, 졸업식장 한쪽에는 각 신용카드 회사에서 나온 선배들이 열심히 동문회 카드 회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마침 신용카드가 필요했기 때문에 동문회 카드의 디자인이 맘에 들었던 두 군데의 카드사를 골라 가입신청서를 써서 내고 카드가 배송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신용카드 회사의 카드가 도착하고 나서 몇 주가 지나도록 다른 한 곳 회사의 카드는 배송되어 오지 않았고 심지어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혹시나 카드 배송 과정에 문제가 있는 건가 걱정되어 그 카드사의 콜센터로 전화를 해보게 되었다.


"네 한달쯤 전에 카드 신규가입 신청을 했는데 카드가 배송되지 않아서 전화했습니다."

"네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신청자분 성함과 주민번호 앞자리 좀 불러주시겠어요?"

"최OO, XXXXXX입니다."


잠시의 기다림 뒤에 상담사 분의 답변은 예상과 다른 내용이었고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재직 중이신 직장이 카드 신규 발급 조건에 해당되지 않아 발급이 거절된 것으로 확인되는데요..."

"아니 OO카드는 이미 발급돼서 카드가 도착했는데 카드 발급 자격 조건이 카드 회사마다 다른가요?"

"네 카드 발급 기준은 회사 고유 정책이라 죄송합니다. 혹시 회사가 상장된 회사인가요?"

"아뇨"

"그럼 코스닥에 등록된 회사인가요?"

"아닌데요"

"그럼 혹시 연간 매출액이 100억 원 이상에 해당하시는지?"

"저희 회사는 작년에 신설된 회사라 아직 사업 준비를 하고 있어서 매출이 없는데요."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발급 요건이 되지 않으세요."

"대기업 계열사인데도 조건이 안된다고요?"

"네 회사 조회가 안됩니다."

"...."


잠시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결국 그 회사에서 신용카드 발급은 실패했고, 그때 마음 상했던 나는 수십 년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은행의 카드와 금융상품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뒤에 IMF사태(1997년)와 신용카드 대란(2003년), 리만브라더스 사태(2008년)등의 커다란 금융위기를 겪어오는 동안에 나에게 신용카드 발급을 거절했던 그 회사는 한 번의 위기도 없이 튼튼하게 성장해오고 있다.


오히려 내 신용이 증명되지 않았어도 카드를 발급해줬던 회사는 국내에서 처음 신용카드 사업을 시작한 역사 깊은 회사였지만 후일 다른 회사에 피인수 합병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내가 겪었던 소소한 경험 만으로 두 회사의 부침(浮沈)이 설명되는 건 아니지만, 여신(與信)을 전문으로 하는 신용카드 사업에서 업(業)의 핵심 본질은 고객의 신용도를 정확히 판단해서 관리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래도 일정한 관련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회사는 업의 성격 상 사업개시 초기 인프라 확보에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기에 고객을 모아 매출이 어느 정도 규모에 이르기 전까지는 지속적인 적자를 감내해야 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입사 후로도 수년간 회사는 적자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회사가 적자를 이어가는 중에 나는 회사의 전략기획팀으로 부서 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략기획 부서로 이동하고 나서의 생활은 처음에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한창 회사가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절에도 야근과 휴일근무를 밥 먹듯 하던 전략부서에서는 회사 비용으로 식사를 하면서 아쉬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식사 이외에도 share 하기 위한 요리를 추가 주문하는 건 기본이고, 고기까지 원 없이 먹을 수 있어서 적어도 먹는 데 있어서는 적자를 내고 있는 회사라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소속 팀장님과 팀의 선임들은 모두 그렇게 식사하는 걸 당연히 여겼고 몸이 힘들게 일하는데 먹는 거라도 잘 먹어야지 하는 걸 당연하게 이야기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부서장이었던 임원분의 지론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그룹 내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전략통이라고 알려졌던 그 임원분께서는 직원들의 식사에 소요되는 비용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난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가끔 식사자리에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점점 공감하게 되었다.


"직원이 밥 많이 먹어서 망하는 회사는 한 군데도 없어. 회사가 망하는 건 전략이 잘못돼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당신들 밥 잘 먹고 일을 잘하라고."


물론 모든 부서의 사람들이 그렇게 밥을 잘 먹으면서 일하는 건 아니었지만 전략기획 부서의 직원들은 진짜로 사생활도 없이 거의 모든 시간을 회사에 묶여 수당이랄 것도 없는 휴일근무와 야근에 내몰리던 시절이니 식사 자리는 그런 업무 강도에 대한 보상 같은 성격도 있었다.


그리고 진짜로 수십 년의 직장생활을 거쳐온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임원분의 말씀에 반하는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누구라도 직원이 밥 많이 먹어서 회사가 망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그럴 가능성이 보이는 상황이 오면 어느 회사라도 밥값을 먼저 줄였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그분의 얘기대로 전략을 잘못 세워 회사가 어려워지는 사례는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었다. 전략을 잘못 세운다는 것은 회사가 처한 사업 환경을 잘못 읽고, 자기 회사가 가진 역량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그래서 잘못된 목표를 세우는 경우일 것이다.


그렇게 설정된 목표를 위해 조직을 드라이브하고, 그 결과 성과가 나지 않거나 실질적인 성과와 무관한 지표뿐인 성과를 떠받들다 보면 회사는 오히려 경쟁력을 잃는 것이다.




처음 회사라는 조직에 발을 디뎠을 때는 회사가 어려워진다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 인지를 고민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후로 여러 가지 일을 겪고 주변에서 다른 여러 회사의 부침을 목격하면서 기업이 위기를 겪게 되는 이유에 대한 내 나름의 관점이 생긴 것 같다.


내가 생각했을 때 회사가 위기를 맞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회사가 영위하는 사업이 갖는 업의 본질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앞서 경험한 사례처럼 신용카드 회사 같은 여신 전문회사가 고객의 신용도 관리를 소홀히 하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자동차 회사가 공장에서의 조립 품질을 관리하지 못하거나, 호텔 사업을 하는 회사가 고객 예약 시스템을 부실하게 운영하거나, IT 플랫폼 회사가 자체 개발 인력을 확보하고 육성하는 것을 게을리하는 것 등은 모두 해당 사업의 경쟁 원천이 되는 업의 본질을 소홀히 하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경우의 각 회사들은 해당 업역에서 경쟁력을 잃고 도태될 수밖에 없음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다음으로는 잘못된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는 경우이다.

신용카드 회사가 신용과 관계없이 신규 회원 유치실적 만을 지상 목표로 관리하고 자동차 회사가 생산 효율을 지향한다고 해서 모듈화 등에 대한 준비 없이 여러 차종을 하나의 라인에서 생산하거나, 호텔이 영업효율을 높인다고 복수의 예약 플랫폼과 계약하여 운영한다면 그런 목표 달성 과정에서의 부작용을 감당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나아갈 지향점이 옳다고 해서 과정 상의 목표들이 제대로 전략적 연계성을 갖지 못한다면 개별적인 과제를 달성하고도 결과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찢어놓은 개별 과제는 각 부서가 다 달성했다고 주장하는데 결과적으로 전체 목표는 달성되지 않은 그런 경우 말이다.


그런데 첫 번째 업의 본질에 소홀한 경우도 그렇고 두 번째 전략적 목표가 잘못 설정되는 것도 그렇고 그런 상황이란 것은 결국 경영자가 제대로 사업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직을 드라이브하는데서 문제가 시작된다.


최종적으로 조직 내부의 성과를 판단하는 사람이 무엇에 가치를 두는가에 따라 내부의 활동 방식이 변화하게 되니까 결국 회사의 생존과 성장에 가장 영향을 끼치는 것은 경영자 그것도 최고 경영자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결국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선조의 가르침은 다시금 그 묘의(妙意)를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기업은 영속적인 생존과 성장을 모색해야 하는데 최고경영자 개인 한 명으로 인해 너무 많은 영향을 받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최고경영자가 회사의 전략 목표와 과제를 설정함에 있어 충분한 정보와 적절한 견제장치도 있어야 할텐데 마치 회사의 CEO는 회사와 관계된 모든 일을 이미 잘 알고 판단할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깔고 일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쉬울 따름이다.


"아무렴 그렇지요 그렇고 말고요..." 라고 하는 사람들만 곁에 있고 상사의 판단에 맞추어 일하는 조직이라면 그런 위험이 더. 커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더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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