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가둔 함정

by 랜덤초이


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할 땐 우리 회사가 아직 돈을 벌지 못하는 상태였다.

매출이 없는 영리법인이라니 상식적으로 이해되기 어렵겠지만, 그때는 회사가 신설되어 아직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기 전의 준비 단계였기 때문이다.


새로 설립된 회사이다 보니 회사의 경영진은 대부분 해당 사업에 전문성을 갖고 있지 않았고, 직원들의 인적 구성 역시 같은 대기업 계열사에서 차출되어 오거나 경력직 직원이 섞여 있어서 알게 모르게 서로 간의 알력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신입사원이 눈치 보며 일할 여유는 물론 없었고, 처음 시작하는 사업에서 비전문가인 리더들에 의해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다 보니 회사에서는 머리로 이해해서 일하기보다는 필요한 일을 그때그때 해치워 나간다는 느낌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 해야 하는 일들에는 명확한 목적과 이유가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면 고객을 관리해야 하니까 콜센터를 구축해야 했고,

그러려면 당연하게도 건물 매입과 구내 통신 시스템을 설치하고,

고객 상담에 필요한 전산 소프트웨어를 도입하고,

적정 규모의 인원을 예측하여 채용해서 훈련시키고,

고객 VOC 피드백 프로세스를 만들고,

마케팅 부서와 협업해서 고객관리 멤버십 체계를 만드는 등 지금 같으면 여러 부서가 협업 내지 분업해서 해야 할 일을 그냥 앞뒤 가릴 것 없이 진행했었다.


그때 했던 일들은 당장 하지 않으면 펑크가 나는 일이었고, 늦춰지면 다른 일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쳐 대환장이 벌어지게 되는 그런 일들을 빠르게 해나가야 했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의 규모는 훨씬 커지고 업무가 전문화되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굉장히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바쁜 나날이 지나간다.

그런데 각 부서에서 하는 일들을 접하다 보면 우리가 하고 있는 게 과연 초창기에 하던 그런 일(work)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신사업을 위해 아이디어를 공모하고, 선진 기업을 벤치마킹을 하고, 타사의 동향을 분석하고, 직장 분위기의 활력을 높이기 위해 행사를 진행하고, 경영진과 직원들 간 소통을 위한 행사를 기획하고, 경진대회 같은 행사로 직원 간 경쟁을 촉진하는 그런 종류의 일들을 보면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일들이 회사가 운영되는데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는데, 그 빈도와 그 일에 매달리는 직원들의 수가 본질적인 업무에 투입되는 사람들보다 더 많고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익숙한 단어는 아니지만 'activity trap'이라는 말이 있다.

그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Noun

activity trap (plural activity traps)

(management) The risk of becoming so busy with an activity as to forget what it is supposed to achieve.


'경영에 있어 우리가 목적한 일이 무엇인지 잊을 만큼 다양한 활동들로 바빠지게 되는 위험'을 얘기하는 말이다.


단어의 핵심적인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Work'와 'Activity'를 구분해야 한다.

목적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하는 행동이 일(Work)이라면 활동(Activity)은 목적한 결과와 연계되지 않은 그냥 행동들을 나타낸다.


즉 'activity trap' 이란 말은 우리가 일이 아니라 다른 부수적인 활동들로 바빠서 본질적인 일의 목적을 잊게 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인 것이다.


회사의 많은 부서가 그들의 미션과 목표를 제시할 때, 무슨 무슨 기반 확보, 어쩌고 저쩌고 전략 수립, 어떤 어떤 경험 축적, 그리고 이런저런 문화 조성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대부분 그런 종류의 일들은 회사가 처음 생겼을 때엔 당연히 들어보지 못했던 고상한 목표들이다.


그리고 그런 목표를 위해 진행되는 활동들은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단위 조직에서 마무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진짜로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숟가락을 얻어 자신들의 성과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으로 비치는 경우가 많고,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다음 단계의 일로 연계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어쩌면 사람들은 'activity trap'에 스스로를 직접 가두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자꾸만 뭔가의 활동을 벌이고, 다른 사람들은 또 거기에 맞춰줘야 하니까 가외(加外)의 일에 동원되게 되는 악순환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 바쁜 동안에는 뭐라도 하는 것 같으니까 스스로의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어서 그런 trap에 갇힌 줄도 모르고 그곳에 안주하게 되는 게 아닐까?


무슨 단어가 존재하고 쓰이는 것은 그 단어로 표현되는 실상이 있으니까 그 결과로 활용되는 것 이리라.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 주변에선 'activity trap'이란 말이 그 존재 이유가 없어지면 하는 바람이다.


도대체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이유 때문에 하는 일인지 무슨 결과로 이어지는지도 모르고 그냥 바쁘기만 하다면 스스로의 생활이 너무 부질없게 느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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