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알고 있는 일본어 욕설(辱說) 중에 '빠가'란 말이 있다.
ばか [馬鹿]
1. 어리석음;바보, 2. 썩 상식적이 아닌 일;또, 그런 사람, 3. 쓸모없음;어처구니없음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볼 때면 가끔 듣는 단어였고, 그게 우리말로 '바보'라는 뜻이라는 건 언제부터 인지 모를 정도로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자(漢字)로 표시된 '빠가'라는 단어를 보니 의외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말 마(馬)'와 '사슴 록(鹿)', 두 글자가 합쳐져서 왜 '바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고 궁금함에 인터넷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게 되었다.
몇몇 문서에서 확인해보니 '빠가'라는 말의 어원으로 몇 가지 유력한 설이 있지만 한자 표현에 대해서는 중국 진(秦, B.C. 221~B.C. 207)나라 시대의 고사(故事)로부터 유래한다는 해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가 그것이다.
'지록위마'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농락하고 권세를 함부로 부리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운 '진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趙高)'는 황제의 맏아들인 부소(扶蘇)를 죽게 만들고 어리석은 호해(胡亥) 왕자를 이세황제(二世皇帝)로 옹립했다.
조고가 최고 관직인 승상(丞相)에 임명되어 진의 국사(國事)를 모두 전결(專決)하게 되고 자신의 권세가 높아지자 하루는 사슴(鹿) 한 마리를 끌고 와서 황제 호해에게 말(馬)을 한 마리 바치겠다고 말한다.
호해는 '이것은 사슴이지 않나?'라고 주변의 대신들에게 물었지만 대신들은 대부분 조고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말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대신 중에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사실대로 사슴이라고 대답하는 자도 있었는데, 조고는 이들을 기억하여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고 전해진다.
'빠가'라는 말의 어원을 해설한 글에는 위의 고사에서 '말과 사슴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빗대 '빠가'라는 단어가 쓰인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사실 '지록위마'의 고사에서 진짜로 말과 사슴을 구분하지 못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았나 싶다.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대신들까지 이구동성으로 말이라 하니 헷갈릴 수밖에 없었던 황제 호해 정도가 아닐까?
삼인성호(三人成虎)란 말도 있듯이 아예 없는 말도 여럿이 하게 되면 진짜로 믿을 수밖에 없다는데 승상과 뭇 대신들이 사슴을 말이라 우겨대니 황제라도 그런가 하면서 잠시 헷갈리는 것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싶다. (어쩌면 대신들과 다투지 않으려 참은거겠지 싶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슴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위 고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4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 사슴과 말을 구분하면서도 황제에게 사슴을 말이라 이야기한 승상 조고
2) 사슴인 줄 알았는데 모두들 말이라 하니 헷갈려 한 황제 호해
3) 조고의 권세가 무서워 사슴인 줄 알면서도 말이라고 얘기한 대신들
4) 사슴은 사슴이라고 정직하게 말한 이유로 처형당한 대신
우리가 '지록위마'의 고사에 등장하는 사람 중 가장 욕먹어 마땅하다고 생각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나라면 그 1순위는 당연히 의도를 가지고 황제를 농락한 조고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대신으로서 부당한 권력의 농간에 빌붙은 대신들 역시 욕을 먹는 게 마땅한 자들이라 본다.
권력이란 게 영원한 것도 아닐텐데 수치심도 없이 거짓을 일삼고 그에 영햡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욕먹어 마땅한 사람들이 아닐까 ...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속는 게 바보이고 정직하면 피해보는 법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 서글프기까지 하다.
'빠가'는 어쩌면 진짜로 어리석은 사람들을 욕하는 게 아니라, 힘없이 순응(順應)하는 사람들을 조롱(嘲弄)하는 표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