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은 신중하게

by 랜덤초이

회사가 서울역 주변으로 이전한 후,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집에서 출퇴근할 때는 주로 광역버스를 이용했다.


서울역 버스 환승정거장에서 내려 지하철 역사를 통과해 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서울역 10번 출구로 나오면 다시 100m쯤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나서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100m의 오르막길이 사실 객관적으로 그렇게 힘든 길은 아닌데 출근길이란 특수상황 때문인지 힘들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고, 비가 오거나 눈이라도 쌓인 날이면 경사진 오르막을 걸어가는게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새벽에 점검 차 에스컬레이터라도 세워놓은 날이면 그날은 출근길에 그 날 에너지의 절반은 써버리는 것 같았다.


서울역 사옥으로 출근하는 동안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평소보다 집에서 더 일찍 나오게 되었고 시내에서도 길이 막히지 않아 서울역 환승정거장에 7시 좀 넘어 도착하게 되었다.

정상적인 출근 시간을 고려하면 한 시간 이상 이른 시간이었지만 경기도민이 버스 좌석에 앉아서 출근하려면 부지런한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전날의 숙취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지하철 10번 출구 쪽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큰 목소리로 소리치는 게 들렸다.


“야 거기 서! 저 새끼 잡아”


전방의 에스컬레이터 쪽에서 캐주얼 차림의 안경을 쓴 평범한 남자가 쏜살같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선 검은 양복을 입고 작은 체구였지만 다부진 인상을 가진 스포츠머리의 사내가 쫓아오고 있었다.


뭔가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추격자의 얼굴을 보니 아침부터 저 사람들 간에 시비가 붙은 거구나 생각이 들었고, 나는 시비에 말려들지 않게 옆으로 살짝 길을 비켰다.

나를 스쳐 달려가는 그들의 스피드는 정말 필사적인 수준이어서 잠시 뒤돌아 보는 순간에 길의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난 아마도 뒤에서 쫓아가는 사내가 건달인가 싶었고, 안경 쓴 순한 모습의 사내가 그를 피해 도망가고 있는 건가 생각하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 지상으로 올라갔다.


지상에 다다랐을 때 에스컬레이터 앞에는 뭔가 심각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은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이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이 나누던 대화 내용은 내 짐작을 완전히 벗어난 내용이었다.


“저희도 보니까 뒤에서 핸드폰으로 촬영을 하는 거예요.”


“쫓아가신 아저씨가 잡을 수 있을까요?”


“어떡하죠 여기서 계속 기다릴 수도 없고 …”


직장 동료들로 보이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내가 목격한 상황을 재구성해보니 쫓기던 사람은 앞서 올라가던 여성의 치마 밑을 도촬하던 몰카범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뒤에 쫓아가던 분이 의로운 마음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현행범을 쫓던 것인데, 난 외모와 순간의 이미지로만 상황을 판단해서 그 둘의 진짜 모습을 오해했던 것이다.


사람에 대해 짧은 시간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이렇게 치명적인 실수의 개연성이 있다는 걸 경험했으면서도 나는 같은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초겨울이 되어 아침의 날씨가 한창 쌀쌀해질 무렵이었다.


마침 출근길에 길이 막히면서 서울역에 도착했을 땐 한창 출근 중인 사람들의 무리와 섞이게 되었다.

지하철역에서 회사로 걸어 올라가는 동안 저 앞 전방에는 소심하게 판촉용 전단을 나눠주고 있는 초로의 아저씨가 보였다.


판촉활동이 익숙하지 않은 듯 쭈뼛쭈뼛 출근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전단을 건네는 모습을 보니 과거에 회사가 어렵고 힘들 때 우리 직원들도 저런 판촉활동을 많이 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사람들은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는 사람이 드물어 보였고 아저씨가 들이미는 전단지를 받아 드는 사람이 적어 보였다.


저렇게 아침부터 출근길의 직장인들에게 판촉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해 본 적이 있기에 나는 아저씨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고, 일부러 그 아저씨 앞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어 아저씨가 전해준 전단지를 받았다.


고마워서인지 놀라워서인지 수줍게 미소 지으면서 아저씨가 건네 준 A5 사이즈의 전단지엔 노란 배경에 빨강, 파랑 글씨로 생각지도 못한 문구가 적혀있었다.


“OO이발소, 남성 전용 휴식공간, 24시간 운영, 이발도 됩니다.”


이발소인데 “이발도 됩니다”라는 표현을 보니 대체 어떤 영업을 하는 곳인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출근길에 회사 직원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당당히 걸어가 전단지를 받은 내 손이 부끄러워졌다.


파렴치한 몰카범을 평범한 시민으로, 정의를 위해 용기 낸 의인을 건달로, 풍속(?)업소 사장님을 판촉에 익숙하지 않은 수줍은 직장인으로 착각한 건 모두 다 내가 너무 서둘러서 판단했던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를 속이거나 숨긴 게 없었고, 나 역시 일부러 그들을 오해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동안 제한된 정보만으로 너무 쉽게 상황을 단정짓고 나니 보고 싶은 데로 보였던 것이다.


살다보니 나의 정확한 이해와 판단을 위해 누군가로부터 항상 충분한 시간과 정보가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제약 속에서도 살아가려면 빠른 판단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다짐해본다.

빠르게 판단을 하더라도 그 결과가 최종적인 것이라고 단정지어 생각하지 말자.

나도 내 의도와 달리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런 걸 알게 되었을 때 담백하게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스스로의 판단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진 많은 갈등과 분쟁이 조금이나마 완화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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