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즐겨보는 TV 예능 중에 코로나 시대 해외여행의 갈증을 풀어주는 ‘톡파원 25시’란 프로그램이 있다.
JTBC에서 방영 중인 해당 프로그램은 유학, 취직, 결혼, 이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해외에서 살고 있는 한국계의 젊은 체류자가 타지에서의 생활이나 관광지를 소개하고 화상회의를 하듯 프로그램의 패널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형식의 구성이다.
스마트폰과 액션캠 등 디지털에 익숙한 젊은 톡파원들이 스스로가 PD이자 출연자가 되어 직접 주제를 골라 소개하고 촬영과 내레이션을 하는 모습을 보면, 한편으론 대학교 조별 과제처럼 풋풋하게 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전문 방송사 못지않게 수준 높은 구성과 내실을 보여준다.
그동안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엔 왜 이렇게 노래 잘하는 사람이 많은 거야?" 생각했는데, '톡파원 25시'를 보면서는 "우리나라엔 왜 이렇게 말 잘하고 잘생긴 사람들이 많은 거야?"라고도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심지어 세계 방방곡곡에서 저마다의 삶을 개척하고 있는 걸 보면 부럽고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톡파원 25시'엔 스튜디오에서 톡파원이 보내온 영상을 함께 리뷰하는 MC와 고정 패널들의 역할도 눈에 띈다.
전현무, 김숙, 양세찬, 이찬원 같이 검증된 MC들의 역할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톡파원들과는 반대로 해외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타일러(美), 다니엘(獨), 알베르토(伊), 타쿠야(日) 등 ‘비정상회담’으로 익숙한 주한 외국인들이 고정 패널로 함께 하다 보니 그들의 경험과 관점에서 톡파원의 소개에 의견을 더할 수 있고 그래서 더욱 다양한 생각을 접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특히 그날그날 소개되는 내용에 따라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초대해 함께 이야기를 하다 보니, 깊이 있는 지식과 이해를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프로그램보다 훨씬 다채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최근 '톡파원 25시' 노르웨이 편에서는 그곳에서 일하는 젊은 의사분이 오슬로의 대표적 관광지를 소개하는 내용이 방송되었고, 오슬로 여정의 말미에 '21년 개관한 뭉크 뮤지엄(Munch Museum)을 찾아가는 모습이 있었다.
미술에 대해 더 풍부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미깡(미술 깡패) 도슨트로 알려진 이창용 님이 초대되었고, 그의 친절한 소개 덕에 뭉크에 대한 다양한 배경지식을 함께 듣다 보니 화면 속 소개가 훨씬 재밌게 느껴질 수 있었다.
‘절규’란 작품으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미술가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의 작품들을 전시한 미술관은 13층으로 건축되어 그 규모부터가 우선 놀랍게 다가왔다.
그런 웅장한 건물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뭉크가 25천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는 것도 내게는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고 그 수많은 작품 속에서도 단 하나의 작품이 독보적으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매우 신기하게 느껴졌다.
'미깡'의 설명을 듣자니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운 가족들을 차례차례 병마로 잃고 사랑에 상처받으며 80여 년 평생을 죽음과 고통을 마주하며 살았단 얘기를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작품 ‘절규’ 속 주인공이 왜 그렇게 비참해 보였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작품 '절규'에는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란 글이 적혀있다고 한다. 세간의 혹평에 대한 절망에서 뭉크 자신이 써놓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가 얼마나 큰 고통과 역경을 겪으며 작품 창작을 이어왔을지 새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고통과 고난을 겪으면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 경우는 많은 사례가 존재한다.
억울한 이유로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당하고도 최초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 '사기(史記)'를 집필한 사마천(司馬遷)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사마천이 남긴 '발분저서(發憤著書)'란 말은 예술가의 창작은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자극되어 명작을 남긴다'는 이야기로 작품 창작의 심리적 동기를 설명하는 이론으로도 회자된다.
감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을 인생을 직접 살아오면서 아니 살아내면서
시대와 인종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창작해낸 걸 보면 실로 대단하다는 경지를 넘어 인간에 대한 경외(敬畏)마저 생기게 된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겪는 경우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그런 경우가 꼭 작가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텐데 …
어떤 이들은 그런 경험으로 무너지고 스러지지만 어떤 이는 이를 동기로 삼아 훌륭한 작품을 남기는 걸 보면 어려움 속에 역작을 남긴 그들의 생애가 존경스럽고 어떤 면에서는 연민의 마음을 갖게 된다.
흔히들 ‘창작의 고통’ 이란 말에 익숙하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하는 일이고 창작의 한계에 닥치면 작업 자체가 고통스러워지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반대로 고통이 동기가 되어 창작을 하기도 한다니 이건 마치 닭과 달걀처럼 서로 이어진 하나의 순환 과정이란 얘기 일까도 싶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나 역시도 기록하고 남기고 싶은 나만의 어려운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마치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을 내뱉듯 적어내던 글들이었는데 …
어느새 글을 쓰는 빈도가 줄어들고 거칠고 직설적인 표현을 꺼리게 되어가는 걸 느낀다.
혹시 이런 과정이 내가 겪었던 어려움과 내가 글을 쓰는 노력 사이에 타협의 과정으로 가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든다.
만일 그런 거라면 나의 창작 의지가 퇴색되고 있는 것인가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아마도 창작은 기록과 치유의 과정이 되는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내 경험의 크기에 어울리는 적당한 글을 담담히 쓸 수 있는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