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철이 되다 보니 내가 시험을 친 오래전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당시는 수능 이전의 세대였고 지금보다 전국 단위의 학력평가 시험이 자주 이뤄지던 시절이라 고3이 되면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확인할 일이 아주 자주 있었다.
모의시험을 치고 나면 문제지와 답안을 걷어가기 때문에 시험 결과는 부정확한 개인의 기억에 의존해서 가채점을 해야 했고, 학력 평가사로부터 채점된 최종 성적표를 받아 들게 되기까진 한두 주 정도의 시간이 걸렸었다.
친구들과 정답을 맞혀서 각자의 가채점 결과를 공유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친구들의 성격에 따라 가채점과 진짜 성적과의 차이가 일정한 경향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친구의 경우엔 "나 이번에 270점 나왔어"라고 말하지만, 실제 석차가 발표될 땐 그 점수에 맞는 등수가 나오지 않기도 했고, "나 260점 나온 것 같아"라는 예상을 한 친구가 오히려 더 성적이 높게 나오기도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대입시험은 340점 만점, 체력장 20점을 제외하면 320점이 만점인 시절이다.)
한두 번 그런 경우를 보면 그냥 자기가 적어 낸 정답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거나 주관식 문제 채점에서 소소한 이슈가 있겠거니 생각할 텐데, 계속해서 특정한 친구 녀석은 자기가 말한 점수보다 낮게 나오고 또 어떤 친구는 그 반대인 걸 보면 그건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나의 경우가 후자에 가까웠는데 난 내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기억에 대해서는 내가 손해 보는 방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2번을 적었는지 3번을 적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면 그냥 그 문제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관식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정확한 정답으로 인정해줄지 아닐지 모호할 땐 일단 내가 손해 보는 쪽으로 예상해놓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성적이 나올 땐 내가 예상한 점수보다 낮게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렇게 나중에 실망하지 않게 지금은 나의 기대와 희망을 보류해 놓는 것이 더 마음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야 미리 기대를 하다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마주했을 때의 실망과 낭패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진짜 대입시험을 볼 때, 내가 생각하는 점수보다는 당연히 점수가 더 잘 나올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생겨 입시에 임하는 마음이 한결 편하게 느껴졌었다.
그렇게 애초에 애매한 희망은 일단 유보하는 걸 편하게 생각하는 나도 정반대로 의사결정을 하는 순간이 있었고, 그건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이용할 때의 경험이었다.
수년 전 회사는 스마트폰 앱으로 제공되는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만들어 고객들에게 제공했다.
경쟁사가 꽤 선도적인 내비게이션 앱 서비스를 제공하며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보니, 우리 회사도 그에 대응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사용 중의 문제점이 확인되면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 원인을 찾고 해결하려 열심이었다.
경영진의 관심도 집중되어 서비스에 대한 여러 다양한 불만사항이 접수되곤 했는데, 많은 불만 중에 대표적인 불만은 우리 서비스가 경쟁사에 비해 빠른 길 추천이 잘 되지 않는단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서울역에서 강남역으로 출발하기 전에 경로 검색을 하면 우리 네비로는 48분 소요시간이 표시되고 경쟁사의 네비로는 42분의 경로가 추천된다는 식이었다.
담당 팀에선 실시간 교통정보의 수집 정확도나 지도정보의 최신성 또는 경로 판별 로직의 문제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고민과 분석을 진행했지만 특별한 문제를 찾지 못했고, 대부분의 사례에서 경쟁사가 더 빠른 추천경로를 보여주는 건 당최 이해가지 않는 결과였다.
그러다 보니 아르바이트생들까지 동원하여 수십 수백여 차례에 걸쳐 빠른 길 추천 경로에 대한 비교 테스트를 해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알게 된 사실은 결국 두 가지 내비게이션에서 알려주는 예상 소요시간이 어떻게 다르든 간에 실제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은 거의 동일했단 것이었다.
42분으로 알려준 경쟁 서비스도 가다 보면 실시간 교통정보를 반영해 수정되며 45분이 걸리고, 48분을 알려준 우리 서비스도 실시간 정보를 반영해 수정되다 보면 결국 45분쯤 도착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런 차이가 일정한 경향성을 보인단 얘기는 결국 '실시간 교통상황 변화로 인해 예상 시간의 10% 내외에서 오차는 당연히 존재할 수 있고 그런 오차 보정의 로직을 최초 희망적인 시간으로 제시할 것인가 아니면 보수적인 시간으로 제시할 것인가에 차이가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똑같이 10% 이내의 차이니까 두 서비스에 대해 고객이 동일한 만족도를 갖게 될까 하면 그건 분명 아니었다.
만약 서로 다른 내비게이션 서비스가 예상 소요시간을 다르게 알려주면, '빠른 길'이란 추천 옵션을 선택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히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목표가 제시되는 경우에 더 기대를 갖고 선택하게 된다. 이미 마음이 급해서 그런 희망을 구하는 사람에게 일부러 보수적인 희망을 보여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운행 중에 혹시 좀 더 늦어지는 경우를 경험하더라도, 그건 자기도 도로 상황을 통해 그 이유를 일부 체감하게 될 터이니 더욱 그러하다.
어떤 상황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에 따라 희망은 보수적으로 가지는 게 좋을 때도 있고, 도전적으로 가지는 게 편할 때도 있는가 보다.
같은 사람도 상황에 따라 보수적일 수도 낙관적일 수도 있는 걸 보니 말이다.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축구의 최종 성적은 어떻게 될까?
'이번엔 2002년의 성과를 뛰어넘어 결승에 까지 오를 수 있을 거야'라고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예선 통과가 어려울 수도 있어'라고 비관적 전망을 하고 있어야 할까?
어떻게 희망과 전망을 갖고 있는 것이 월드컵을 좀 더 흥미롭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사람마다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희망을 갖는 게 아니다 보니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싶다. 다만 희망과 기대를 어느 방향으로 어느 수준으로 가지고 있는가와 달리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이 행복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다들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절실한 마음으로 대회를 준비해 온 선수들과 국민들이 행복하게 대회를 즐기고 마무리할 수 있길 응원하자. 지금은 그게 우선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