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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Jun 30. 2023

두 얼굴의 사나이

다양한 OTT(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애플TV, WATCHA 등)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제작된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게 된 요즘,

TV 지상파 채널에선 과거와 달리 외국에서 제작된 시리즈물을 좀체 찾아볼 수 없다.


한 때 지상파 TV 채널이 유일한 외화 시리즈물의 유통 채널이었던 점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콘텐츠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향상된 점도 주된 이유겠지만, 통신과 데이터 전송기술 발전에 따른 영상 콘텐츠 유통 환경의 변화가 제작사의 정책이나 방송사의 재정 영향 그리고 시청자의 영상소비 방식(실시간→VOD) 등에까지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이지 싶다.


지상파 TV가 외화시리즈 유통을 독점하던 시절엔 프라임 타임에도 외화시리즈가 편성되었다.

그래서 주말 저녁이면 '1박 2일'과 '런닝맨' 중에 뭘 볼지 고민하듯, 동시간에 방영되는 ‘V’와  ‘에어울프’ 중 무슨 프로그램을 봐야 할지 채널 다툼이 있기도 했었다.

심지어 아이들이 보는 드라마도 ‘말괄량이 삐삐’, ‘천사들의 합창’ 같은 외화 시리즈가 제공되었기에 지금까지 당시의 기억으로 '삐삐'나 '히메나 선생님'을 추억하는 세대가 많이 있다.


국내에서 TV로 방영되었던 수많은 외화 시리즈물 중 내가 유독 시청하기 불편한 작품이 있었는데 ‘두 얼굴의 사나이’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 친구들이라면 제목을 듣고 아주 낯설게 들리겠지만 '두 얼굴의 사나이'에서 '빌 빅스비(Wilfred Bailey Bixby)'와 '루 페리뇨(Lou Ferrigno)'가 연기한 주인공의 이름을 듣는다면 장담컨대 지금도 남녀노소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캐릭터일 것이라 확신한다.


'두 얼굴의 사나이'가 바로 '타노스'로부터 인류를 구한 '어벤저스(Avengers)'의 일원인 '헐크(Hulk)'이니 말이다.

시리즈의 원제는 ‘The incredible Hulk’였지만, 국내에서 방송에 편성될 당시엔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배너 박사와 헐크라는 두 가지 존재를 동시에 가진 주인공을 묘사한 제목이었다.


헐크는 최근까지도 꾸준히 재창조되며 사랑받고 있는 캐릭터인 만큼 과거 TV 시리즈로 방영될 당시의 인기도 대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내가 해당 시리즈를 볼 때 불편했던 이유는 배너 박사가 초록색 괴물로 변하는 순간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고 무섭게 전달됐기 때문이다.


배너 박사가 고통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면 피부는 초록색으로 바뀌고 몸이 거대해지면서 옷이 찢겨나갔다. (바지는 늘 스판덱스로 입고 다닌 것 같다.) 고통스러워하는 눈이 클로즈업될 때 눈동자 색깔이 하얗게 변하는 모습은 어린 마음에 너무 충격적이었어서 그 장면만큼은 눈을 감고 봤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어린 시절 무섭고 불편한 마음을 감수하고 마주했던 '두 얼굴의 사나이'는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직장에서 자주 보게 된다.

물론 요즘 보게 되는 '두 얼굴의 사나이'는 예전의 헐크처럼 외모가 무섭게 바뀌거나 성격이 급격히 포악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양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지만 나는 지금 보는 '두 얼굴의 사나이'가 과거의 '헐크'보다 더 무섭게 보이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어떤 상사는 자신이 다 알고 있고 책임질 테니 당신은 생각 말고 그가 주장하는 내용대로 보고 내용을 써오라고 부하 직원을 압박한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한 보고 내용이 CEO의 챌린지를 받게 되면 그 자리에서 금세 '두 얼굴의 사나이'로 변신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부하 직원을 힐난한다.

앉은자리에서 '유체이탈'을 선보이며 스스로의 결정과 판단을 뒤집는 순발력은 배너 박사처럼 변신을 위해 옷 한 벌 손해 보는 정도의 노력도 시간도 필요 없다.

그저 그를 대신해 욕먹어줄 누군가만 있으면 되니 말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스스로라면 이해하지도 책임지지도 못하는 일을, 남이 맡았을 때 손쉽게 해결될 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CEO 앞에서는 지금의 책임자가 문제라서 쉬운 일을 어렵게 본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똑같은 일을 그가 스스로 책임져야 할 순간이 왔을 때는 역시 '유체이탈'의 신기를 보이며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된다.


"이런 종류의 일은 원래 기대했던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남에게 맡겨놓았을 땐 손쉬운 일이라며 Fact를 외면하다가, 자기가 맡았을 땐 어차피 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두 얼굴의 사나이'를 보면 '루 페리뇨'가 연기한 헐크는 그저 귀여운 수준일 수밖에 없다.


어느새 '인의(仁義)'를 쫓기보다는 얼굴 두껍게 속내를 감추는 '후흑(厚黑)'이 현실적인 처세라고 관심받는 시대이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알기는 할까?

후흑학(厚黑學)을 저술한 저자 리쫑우(李宗吾)도 ‘후흑’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쓰면 욕된 이름을 얻게 될 뿐이지만 나라를 위해서 쓰면 난세에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을?


"후흑을 이용해 사리를 도모할 경우 후흑을 사용하면 할수록 인격은 더욱 비루해진다.

후흑을 이용해 공리를 도모할 경우 후흑을 사용하면 할수록 인격은 더욱 고매해진다"

- 리쭝우


두 얼굴의 사나이들이 도모하고 있는 게 무엇일지는 그들의 비루한 인격이 이미 얘기해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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