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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Sep 10. 2023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요즘은 인기가 시들하지만 한때 서부영화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영화 장르였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주인공이 악당들과 생사의 결투를 치르는 장면을 보면서 

TV 앞에 앉아 있던 어린 나는 주인공의 승리를 열심히 응원하곤 했었다.


상당히 오랜 기간 압도적 인기를 끌던 서부극 장르는 

SF, 액션, 범죄, 스릴러, 공포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점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그렇게 점차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줄어들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기회도 함께 줄어들어 왔다.


내가 영화관에서 마지막으로 본 서부극 장르의 영화는 멜깁슨 주연의 1994년 작품 '매버릭(Maverick)'이었다.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했던 영화 '매버릭'은 분명히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내용은 현대의 코미디적인 요소가 강했다.  그래서일까 '진지하고 고독한 건맨'이 등장하는 서부영화에 익숙해있던 나는 영화의 전개에 실망했고 그즈음부터 서부영화에 대한 나의 애정도 조금씩 퇴색되어 갔다. 


그래서 나에게 '매버릭'이란 단어는 그다지 좋은 기억이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렇게 그냥 영화 속 주인공 이름 정도로 기억하던 '매버릭'이란 단어를 다시 마주치게 된 건 한참의 시간이 지나 직장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그저 사람 이름 정도로만 알고 있던 매버릭이란 단어가 경제용어 사전 속에서 또 다른 의미로 활용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Maverick(=독행기업)' 시장의 경쟁을 촉진하여 시장의 독과점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기업


튀는 전략과 마케팅으로 시장을 흔들고 그 결과 시장에 있는 기업들 간에 고객의 선택을 받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도록 만드는 기업. 그런 기업을 '독행기업'='Maverick'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철 지난 예시이지만 영국의 항공사인 Virgin 아틀래틱 항공 같은 기업이 그런 성격을 가진 기업이라고 얘기되고는 했다. 


버진 레코드 등의 회사를 운영하던 버진 그룹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이 영국 항공의 질 낮은 서비스에 실망하여 직접 항공사를 창업한 경우이다.

창업자의 기행으로도 유명한 회사는 튀는 디자인과 마케팅, 고객서비스 등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여러 항공사들이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매버릭'이란 단어가 왜 그런 뜻을 가진 것인지 궁금하던 차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매버릭은 1800년대 초반의 실존 인물 새뮤얼 매버릭(S. Maverick)의 이름에서 유래한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텍사스의 목장주였던 그는 소들에게 고통을 주기 싫어 불로 지져 소유권을 표시하는 낙인을 찍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낙인이 없는 매버릭 농장의 소’를 ‘매버릭’이라고 불렀고, 매버릭 본인 역시도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은 채 텍사스 독립을 추진했기에 '매버릭'이란 단어에 ‘특정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 ‘독립성이 강한, 전통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인’이라는 뜻이 확장되어 왔다고 한다.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67702)




작년에 대히트를 쳤던 탐 크루즈 주연의 영화 탑건의 부제도 '매버릭'이었다.

주인공 피트 미첼 대령의 파일럿 코드명 '매버릭'을 딴 것이다. 


'매버릭'의 사전적 의미를 알고 나서 영화 속 톰 크루즈의 행동을 보면,

조직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을 믿고 설득하며 도전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매버릭'의 뜻을 잘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라면 조직 내에서 자신의 소신에 따라 타협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을 뭐라고 표현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꽤 오랜 시간 생각을 해봐도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제용어사전에 있는 것처럼 '독행기업'이란 말을 쓰는 건 사람에게 붙일 만한 표현은 아닌 것 같아서 그걸 제외한 적합한 단어를 찾느라 더 어려웠다.


한참을 더 생각해도 긍정적인 뉘앙스의 단어는 잘 떠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청개구리', '반골', '독불장군'처럼 부정적 뉘앙스의 단어만 생각나는 것을 보니 '매버릭'과 등치 시킬 만한 단어가 우리말엔 없는 것인가도 싶었다.

그렇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가 영미권의 국가보다 조직 내에서 소신을 지키며 행동하는 게 더 어려워서인가 싶은 생각도 들어 조금은 서글픈 기분도 든다.


'독행'은 '세속에 따르지 아니하고 높은 지조를 가지고 혼자 나아감'이란 의미이다.

이렇게 좋은 의미로 쓰일 만한 이렇다 할 상징적인 명사가 생각나지 않다니...

이백여 년 전에 텍사스에 살던 '매버릭'씨 말고도 우리의 경험과 역사 속에서 이런 경우에 쉽게 떠올릴 만한 그런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 


유방백세 유취만년(流芳百世 遺臭萬年) 이라던데

'꽃다운 이름(향기)은 백 세대를 가지만, 더러운 이름(악취)은 만년을 간다.'

우리에게도 백 세대쯤 이어질 그런 독행의 아이콘이 등장하길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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