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설 회사로 입사했던 만큼 전혀 매출이 없는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회사는 고객 유치를 위해 수천억 원이 넘는 시설 투자를 선행해야 했던 만큼 빠르게 고객을 늘려가지 않으면 경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시장의 기존 선도 사업자 그리고 같은 시기에 사업을 시작한 경쟁사들과 피 튀기는 고객 쟁탈전이 이뤄지면서 영업조직뿐 아니라 일반 직원들에게도 고객을 유치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직원들의 경우 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영업을 해서 고객을 유치하려니 일반 영업조직과 대리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경쟁력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대부분 직원들은 가족과 친지나 친구들에게 서비스 가입을 부탁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입사 후에 자주 연락도 할 수 없던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까지 전화해서 불편한 부탁을 하는 게 여간 어색하고 어려운 게 아니었다.
특히 동기들보다 조금 일찍 취업한 나로서는 직장인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서비스 가입 영업을 해야 하는 게 창피해지는 순간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대리점보다 가입조건이 안 좋은 친구의 부탁에 흔쾌히 응해주기도 했지만 또 다른 친구는 여러 조건을 따져가면서 친구의 자존감만 긁고 마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회사가 준 기회를 통해 평소 모르던 친구들의 또 다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대학 동창 녀석의 전화를 받았다.
군대 제대 후 복학 시점을 잘 맞추지 못했던 친구는 나보다 늦게 졸업하게 되면서 보험회사 재무팀에 취직한 친구였다.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의 전화에 나는 반가운 마음도 컸지만 그보다 먼저 다른 생각이 앞섰다.
“어 뭐지 … 이 친구도 나처럼 보험 가입자를 유치해야 하는 건가? 그러면 나도 보험 하나 들고 우리 서비스 가입자로 유치해야 하나?”
전화를 받고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친구의 용건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 회사 주재원으로 일본에 가게 됐어. 이번에 나가면 당분간 볼 기회가 없을 것 같다. 우리 만나서 저녁이나 하자.”
친구의 얘기에 나는 내 속 좁은 예상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못 볼 아쉬움에 연락해 온 순수한 친구에게 나는 회사의 과제를 먼저 내세워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내용이 부끄러워지며 회사를 그만 다니고 싶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었다.
코로나를 이유로 주변 사람들과의 교류가 뜸했던 몇 년 전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서 그 친구가 생일이란 걸 알게 되었다.
친구의 이름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나면서 생일을 빌미로 한동안 뜸했던 연락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생일 선물로 커피와 케이크를 모바일 교환권으로 보냈고 답문자를 기다렸지만 답신은 오지 않았다.
혹시 내가 모르는 새에 전화번호가 바뀐 건가 생각도 했지만 프로필 사진을 보면 확실히 내 친구가 맞았다. 아마도 회의 중이거나 일이 바빠서 그런 거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결국 그날 답장을 받지 못했다.
조금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출장을 가거나 했을 수도 있으니 하는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그날의 일을 잊게 되었다.
한 서너 주쯤이나 지났을 무렵
회사 앞 카페에서 동료들과 얘기하고 있을 때 그 친구가 전화를 해왔다.
그러면 그렇지 뭐 장기 출장이나 뭔가 일이 있었던 거지 생각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미안하다. 내가 연락을 못했다. 사실 내가 병원에 있었어”
“아니 왜 무슨 일인데?”
“내가 작년 연말에 회사를 그만두게 됐어 회사 권고로 협력사로 이동하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많았었나 봐. 협력사로 이직해서 출근한 날에 사무실에서 쓰러졌는데 한 일주일 의식이 없었데 … , 정신이 들고 병원에서 톡을 확인했는데 퇴원하고 이제 좀 안정이 돼서 전화한다.”
“어휴 …. 몰랐다. 미안해”
“네가 뭐가 미안해. 케이크 고맙다. 너는 뭐 별일 없지?”
친구는 어쩌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며 건강을 위협받고 있었는데 나는 알량한 생일 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를 기다렸다니...
그날의 일로 나는 또다시 평소 하지 않던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타인에게는 타인 나름의 사정과 이유가 있을 터이니 내 기준과 상황에서 쉽게 판단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었다.
자주 연락하지는 않지만 친구란 참 묘한 관계다.
몇 년을 내왕이 없다가도 만나면 나를 과거로 돌려보내고, 또 별일 아닌 일들로도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고 … 참 묘하다.
그 친구가 내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처럼 나도 어느 친구에게는 그들이 살아가며 뭐라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친구일까? 그런 구실을 하고 있다면 다행이겠지 싶다.
오늘 오랜만에 아무 이유 없이 그 친구에게 연락해 보았다.
물론 반갑게 연락을 받아 준 친구 녀석과 4년 만에 만나 저녁을 하기로 했다.
오늘은 친구와 만나 또 어떤 생각을 해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