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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Oct 04. 2023

두 개의 북(鼓)

'북(鼓)'은 물체를 두드려 소리를 내는 타악기의 대표적인 한 종류이다.

'북'은 울림통에 울림막을 달고 두드려서 공기의 진동을 이용해 소리를 내는데, 아마도 가장 오래된 형태의 악기 중 하나라고 알려진다.


'북(鼓)'이라는 악기(樂器)의 역사는 워낙 오래되다 보니 어린 시절 읽었던 역사책과 전래동화 같은 것에도 '(鼓)'이 등장하고는 했고, 심지어 어떤 북(鼓)들은 고유한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기도 한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漢) 나라가 세워두었다는 한사군(漢四郡) 중의 낙랑(樂浪)에는 '자명고(自鳴鼓)'라는 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자명고'는 외적의 침입을 감지하면 스스로 소리를 내서 위험을 알렸다는 전설로 잘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 치자면 마치 조기경보체계와 민방위 시스템을 통합한 것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고구려의 호동(好童) 왕자가 낙랑을 공격하기 위해, 낙랑 태수의 딸에게 먼저 접근하여 자명고를 찢도록 하고, 그 후 은밀히 공격해서 정복했다는 내용은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 이야기로 아주 잘 알려져 있다.  


또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는 백성들이 원통한 일을 호소하려 할 때, 두드리게 했던 북(鼓), '신문고(申聞鼓)'가 있었다.  

신문고는 중국 송나라 때부터 처음 시행된 제도라는데 상소나 고발 같은 제도적 장치를 보완해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직접 고(告)할 수 있게 한 소통의 장치였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으로 치자면 '신문고'는 각종 제보나 고발 시스템인 셈이다.


어쩌면 두 개의 북에는 재미난 공통점이 있다.

소리를 내는 북이지만 북소리를 들을 일이 전혀 없는 세상이 훨씬 안전한 세상이라는 점이다. 

(자명고의 경우)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이 없어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 없고, (신문고의 경우) 억울하다고 북을 두드리는 백성이 없는 세상이 훨씬 좋은 세상이라는 건 또 두말하면 잔소리다.


웬만하면 절대 울릴 일이 없고 그래서 남들이 들을 일도 없어야 하는 북이지만, 

만약 울릴 일이 있다면 그 소리는 누구에게나 들릴 정도로 크게 멀리 퍼져야만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소리가 나는데도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로 말미암은 결과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과거에는 북이라는 악기가 그런 목적으로 쓰인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낮은 음역대의 긴 파동으로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나가고, 무엇보다 악기 다루는 법이 간단하여 누구나 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같은 이유 때문에 '북(鼓)'이라는 악기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자명고'가 담당했을 조기 경보 체계는 레이더와 각종 센서 등의 장비를 이용해 상황을 판단하고 정보를 전달할 때는 민방위 사이렌이나 휴대폰 긴급문자가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신문고' 역시도 인터넷 게시판과 SNS 서비스 등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어떤 장비가 또 어떤 시스템이 더 효과적으로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는 시대가 변해가며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  다만 그 역할에 활용되는 장비나 시스템은 필요할 때 확실히 동작해야 한다는 점에선 달라질 것이 없다.


평소 관리나 관심이 부족하여 정작 필요한 경우에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항상 관심 있게 그 존재를 인식하고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얼마 전 6년 만에 전국 단위 민방공 훈련이 실시되는 점이 화제가 된 적 있었다.

어렸을 때는 매달 경험했던 민방공 훈련이 어느새 이렇게 낯선 경험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사람들마다 훈련을 경험하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겠지만, 정전협정으로 휴전 중인 나라에서 기초적인 민방공 훈련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이 들기는 한다.


기왕에 사회에 필수적인 기능을 하는 시스템과 제도라면 자명고나 신문고처럼 훨씬 널리 알려져서 필요할 때 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싶다.

그냥 보여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시스템이어서는 안 되니까 필요할 때 동작한다는 점은 늘 감시되어야 한다.  


분명 실제로 들어서는 안 되는 북소리이지만, 진짜 필요할 땐 분명히 들릴 것이라는 확신이 서야 할 것이다. 그러니 두드려서 무슨 반응이 나올지는 꼭 좀 경험해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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