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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Nov 10. 2023

회색(灰色) 인간

“놀 때는 놀고 공부할 때는 공부해라”

학창 시절 주변에서 자주 들어봤던 말이고 나에게도 역시 익숙한 말이다.


위 문장에 딱 한 글자만 더해서 어감을 살려본다면 

“놀 때는 놀고 공부할 때는 공부 [쫌] 해라”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 같다.


대체로 놀 때는 열심히 노는 학생이 공부할 때 금방 몰입하지 못하고 산만한 모습을 보이면 듣게 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직장생활 속에서 업무의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퇴근하면 직장에서의 일은 잊고 스트레스받지 말라’는 처방을 듣고는 한다.  


하지만 아주 쉽게 얘기하는 저런 충고들에 나는 전혀 공감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람이 전기로 움직이는 로봇도 아닌 바에야 마치 스위치가 켜지고 꺼지는 것처럼 '놀 때와 일할 때', '직장에서의 삶과 개인의 삶'을 완전히 구분하는 게 가능한가 싶은 생각에서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의 모드 전환을 손쉽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왜 그런지 그게 정말 어렵다.


학창 시절의 휴일이면 한참 놀 때도 마음 한구석에 이제는 책 좀 보고 문제집 좀 풀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고, 반대로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면서도 상상의 나래를 펴고 공상 속으로 빠져드는 일이 흔했다.


어딘가 놀러 갔을 때도 가방 속에 책 한 권쯤 들어있어야 마음이 편하고(설혹 전혀 읽지 않더라도), 공부하러 가면서도 가방에 만화책이나 테니스공 하나라도 들어 있어야 또 안심이 되었었다.

흑(黑)과 백(白)의 차이처럼 분명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으로도 보일 수 있는 그런 회색(灰色)의 생활이 익숙했던 것이다.


회사에서 겪는 업무 스트레스라는 것도 집에 돌아오는 순간 바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과 관계된 걱정이 있는 사람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그런 걱정을 머릿속에서 100% 지울 수 없는 것처럼 회사 일에 대한 걱정과 아이디어가 집에 왔다고 해서 100% 사라지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은 경계가 분명한 삶보다는 나처럼 회색의 생활이 더욱 익숙할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너무 몰입하면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이 너무 힘든 경우를 경험하게 되니 말이다.


노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함이라고 비난받을지 몰라도

그리고 집에서는 회사일 고민한다고 핀잔 듣고 회사에서는 집안일 걱정한다고 눈치를 줄지 몰라도

회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택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회색의 생활인들은 놀면서도 공부해야 하는 것을 마음에 두고 집에서도 회사일을 생각하고 회사에 있어도 가정에 소홀하지 않기를 원하는 여린 사람들일 뿐이다.

나는 오히려 어느 영역에서나 회색지대의 비중이 넓어지는 것이 사회적 갈등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종교나 이념에서의 극단적 선명성이 인류 역사에 끼쳐온 일들을 되짚어 생각해 본다면 이도저도 아닌 것 같지만 여러 측면의 경우를 다 고려하고 눈치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해가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된다.


건강한 지구를 위해 생물 다양성이 필수적이듯 가정과 조직이 건강해지기 위한 방법은 개인이 흑과 백 사이를 스위치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 중간 어디의 삶이 갖는 다양함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색분자(灰色分子)라는 말은 소속정치적 노선사상적 경향 따위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늘 부정적인 어감을 가진 말로 사용되지만 생각해 보면 분명하지 않은 게 부정적일 이유는 또 뭐가 있는가도 싶다. 

선명성을 택한 사람들이 그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회색 영역의 사람들을 압박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 낸 표현 정도가 아닐까?


나는 선명함보다는 모호함 속에서도 상황에 맞춰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훨씬 유익한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한다.  선명성을 무기로 해당 집단의 이익만을 쫓는 사람들보다는 분명히 그렇다.


그래서 나는 그레이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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