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수능을 보는 둘째를 고사장까지 태워다 주었다.
'자녀교육 성공의 3요소'는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라던데, 개중 가장 자신 있는 건 아빠의 무관심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빠의 무관심이란 요소 하나는 내가 적어도 전국 Top-tier가 아닐까 했지만, 시험준비에 힘써온 아이를 생각하니 고사장에 태워다 주는 건 왠지 직접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엔 휴가를 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전날 준비해 둔 준비물 등을 챙겨 조금 이르게 고사장으로 출발했다. 아이의 긴장을 덜어주기 위해 아빠, 엄마의 입시 경험이나 언니의 대학생활 등 가벼운 얘기를 나누며 옆 동네의 고사장으로 향하던 중, 뒷자리에 앉아있던 아이가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으로 SNS에서 본 얘기를 전해주었다.
"누가 시험장에 가져가려고 무소음 수저통을 샀는데 진짜로 수저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하나도 안 나서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데, 근데 막상 열어보니까 수저가 없더래...ㅋㅋㅋ"
고사장에서 수저 덜그럭 거리는 소리도 조심하려고 무소음 수저통이란 걸 사서 들고 가는 것도 정성이다 생각했지만, 수저가 없어 놀랐을 학생이 그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써서 올린 것도 대단하다 싶어 아빠 엄마 모두 '재밌네..'하고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몇 초 뒤 아이 엄마가 '아앗!!!'하고 소리를 질렀다.
"왜 그래 갑자기?"
"수저통을 안 챙겼다."
"뭐?"
"무소음 수저통 새벽배송 시켰는데 배달이 안 와서 깜빡했어. 도시락통에 수저가 없네"
다른 학생의 무소음 수저통에 수저가 없었단 사실에 웃다가 정작 우리는 수저통도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었다.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아이가 놀라면 안 되겠기에 고사장까지의 이동 동선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수저를 사서 넣어주었다.
아이 엄마가 수저를 사러 편의점에 들어간 사이, 둘째와 나는 이 경험이 얼마나 대단한 우연인지에 대해 얘기했다.
"와 그 수많은 SNS 글 중에서 재밌다고 아빠 엄마에게 얘기해 준 딱 하나의 글이 '무소음 수저통' 이야기인데, 마침 그 얘기가 우리가 놓쳤던 일을 떠올려 대비하게 해 주다니 이건 대단한 행운이다."
"진짜 ㅋㅋ 어쩌면 나 혼자 인도식으로 밥 먹을 뻔했네"
도저히 확률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우연을 통해 실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운 해프닝은 좋은 기운으로 생각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재밌는 해프닝이었지만 하마터면 무서운(?) 이야기가 될 뻔했던 '무소음 수저통' 사건은 우리 가족에게 오래 기억될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정말 누군가를 보호하는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란 게 있나 보다'고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참고로 그날 저녁 배달 온 무소음 수저통을 흔들어보니,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건 아니었고 '무소음'이란 건 그저 하나의 마케팅적 소구 기능이란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