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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Nov 02. 2023

비효율의 삶

얼마 전 인기를 끌었던 웹툰 원작의 드라마 ‘무빙’은 큰 화제를 모으면서 시청자들과 언론의 호평을 받았지만 한 가지 아쉽다는 평가도 있었다.

만약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더라면 ‘오징어 게임’ 만큼의 세계적 흥행을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
아직까지 가입자 기반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디즈니 플러스'에서 공개되어 성과가 아쉽다는 것이었다.


그런 얘기들을 많이 들어서인지 웹툰 원작자이자 드라마 극본을 맡았던 ‘강풀’ 작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디즈니 플러스’를 선택한 이유를 밝힌 적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배속(倍速) 감상(鑑賞) 기능에 대한 창작자의 주관이 작용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많은 영상 플랫폼이 배속 감상 기능을 제공하고 있지만 디즈니 플러스는 그런 기능을 제공하지 않고 있고, 그 점이 강풀 작가에게는 좋아 보였다는 것이었다.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영상 속에서 시간적 여백이나 대사 사이의 호흡까지도 작품 분위기나 인물의 심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임에도 그런 의도가 훼손될 수도 있는 배속 감상이 마뜩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서 해당 기능이 제공되지 않는 '디즈니 플러스'를 택했다는 것이다. 


TV와 영화관이 영상 소비 플랫폼의 전부였던 과거에 비해 요즘에는 정말 다양한 플랫폼에 볼거리들이 넘쳐나고 있다. 
반면 그 많은 영상을 감상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의 시간은 과거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보니 다양한 콘텐츠를 감상하기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들이 생겨나고 있다.


어떤 이는 영상 구간을 스킵(skip)하면서 띄엄띄엄 감상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x 1.25, x 1.5의 속도로 영상을 감상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가 내용을 정리해 놓은 요약 영상만으로 콘텐츠를 감상하기도 한다.


살다 보면 늘 고민하게 되는 포인트는 효율을 선택할 것인가 효과를 고려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직장에서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효율적인 방법으로 효과를 극대화...' 하겠다고 하지만, 어찌 보면 효율과 효과는 실제로 양립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보니 노력의 투입에는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가성비(價性比)'니 '가심비(價心比)'니 하는 말이 생기는 것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도 결국은 같은 말이다.


재원(財源)이 유한(有限) 한 것처럼 시간(時間)도 유한(有限) 하다 보니 영상 콘텐츠를 띄엄띄엄 보고, 빨리 돌려 보고, 요약해서 보는 요즘의 영상 소비 트렌드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투입하는 시간에 비해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한 효율을 추구하는 행동이다. 


2022년 일본 출판사 산세이도(삼성당)는 올해의 10대 신조어 1위로 ‘타이파(タイパ)’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타이파'는 'Time Performance'를 일본식 발음으로 풀어낸 말로 ‘시간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표현하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진 단어가 아니었지만, 시간 대비 효율이 중요해지는 트렌드가 우리나라에서만 심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효율을 중시하는 관점에선 '가성비', '가심비', '시심비', '타이파' 이런 말들이 당연한 얘기지만, 유행처럼 사람들의 가치판단 기준이 획일화되는 현실이 반가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정말 필요하다면 가격을 더 지불해서라도 그리고 진짜 원한다면 시간을 더 들여서라도 원래 원하는 효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효율만 고려해서 쉽고 편한 방식을 찾아 익숙해져 버리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다른 뭔가를 잃어버리며 살아왔던 것 같다.

내비게이션에 익숙해지고는 길눈을 잃었고, 노래방에 익숙해지면서 노래가사를 외우지 못하게 된 것처럼


빠른 속도의 영상 감상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면 정속(定速)의 영상 미디어에 대한 집중력을 잃고 그렇게 되다 보면 극에 대한 몰입이 떨어져서 어느 순간 영화의 감동과 재미도 잊게 될 것 같다는 조급한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지나치게 효율을 추구하는 것에 익숙해지기보다는 가끔씩 비효율적으로 살아보고자 한다.

익숙함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고 비효율의 삶을 받아들이면서, 이제는 조급함을 조금씩이라도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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