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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Oct 13. 2023

명분은 거들뿐

내가 처음 개인용 컴퓨터를 산 건 1991년이었다.


교수님께서는 이제부터는 1인 1PC의 시대가 될 것이라 예언하시며, 앞으로 수업에서 주어질 과제를 해오려면 컴퓨터를 사는 게 유리할 것이라고 신입생들의 PC 구매를 강권하셨다.


당시 우리 학과의 한 학기 등록금은 95만 원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졸라 용산에서 구매한 나의 첫 조립 PC는 135만 원이었다.  

사립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의 1.5배 가격이니 지금 물가로 환산해 보면 아마도 5~6백만 원은 족히 될 법한 엄청난 투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큰돈을 투자해 구입한 첫 PC는 286 AT 컴퓨터였다.

이미 386 SX 컴퓨터가 출시되어 있었지만, 칼라 모니터와 그래픽 카드를 사용하려면 Main CPU는 286 AT로 구성해야 예산에 맞춰 PC를 구매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식한 선택을 해야 했던 이유는 바로 '페르시아의 왕자'라는 게임 때문이었다.

전자상가에 전시된 PC 모니터로 보이던 게임 캐릭터의 움직임은 마치 진짜 사람이 달리는 것처럼 부드러운 모습이었고, 그런 영상을 칼라로 보고 나니 흑백 모니터에는 전혀 눈이 가지 않았다.


결국 등록금보다 비싼 돈을 주고 샀던 컴퓨터는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기 전까지 간간히 게임을 즐기던 나의 첫 게임기 역할을 하고 그 수명을 다했다.  


'앞으로 도래할 1인 1PC 시대를 미리 경험한다.'는 거창한 명분은 나의 첫 번째 게임기 구매이유가 된 것이었다.




내가 PC가 아닌 전용 게임기를 처음 경험한 건 SONY의 'Play Station2'였다.


군대에서 제대하여 복학한 후, 학교 앞 오락실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High score를 경신해서 이름 이니셜을 새기는 걸로 경쟁하던 오락실 게임이 대전형 격투게임을 중심으로 변한 것이었다.

'스트리트 파이터 2'를 시작으로 불붙은 대전형 격투게임은 두대의 게임기를 연결하여 사람들 간 직접 실력을 겨루는 형태로 오락실 이용의 재미를 바꿔놓았다.


우리 학교의 후문에 위치한 오락실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버츄어 파이터 2'의 인기가 높았다.

SEGA에서 만든 '버츄어파이터'는 3D 폴리곤으로 디자인된 캐릭터들의 움직임을 통해, 2D 게임에서 느끼기 힘들었던 현실감과 재미를 전달해 줬다.

파괴력이 높지만 기술 구사를 위한 키조작이 어려웠던 '붕격운신쌍호장' 같은 기술을 써보기 위해서는 조이스틱의 복잡한 조작과 키버튼을 누르는 타이밍이 중요했는데, 그런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이 마치 실제 무술을 익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엄청나게 향상된 3D 그래픽 기반의 게임들은 오락실 기기에서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해외에서는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도 고사양의 콘솔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SONY의 '플레이 스테이션'이 글로벌 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일본 내 경쟁사들도 보다 진보된 게임기를 내놓고 있었고,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시장 참전을 선언한 것이었다.

게임 콘솔의 경쟁 속에서 다양한 3rd party 개발자들이 대우받으며 게임 콘텐츠 생태계는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일본 게임기가 정식 발매되지 않고 있었고, 당연히 게임타이틀도 한글화 패치가 되지 않았기에 구매욕과 현실적 제약 사이에서 오래 줄다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늘 현실보다 이상에 뜻을 두는 법이었으니, 나는 결국 국내에 정식 발매도 이뤄지지 않은 플스 2를 사고 말았다.

'아이러브스쿨'로 연락이 닿은 중학교 동창 녀석이 일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어버린 것처럼 내 구매욕구는 타올라버렸고, 결국 그 친구에게 부탁해 50만 원을 주고 일본판 플스 2를 손에 넣고 말았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전원규격이 달라서 '도란스(Electric Transformer)'를 써야 하는 귀찮은 사용환경 구성도 필요했지만 그런 불편함 정도는 지름신의 영험함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오히려 국내 정발판이 아니라는 불편함이 존재함으로써, '외국어 공부에 대한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것이란 명분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또 10년쯤 지난 즈음에는 TV 광고에 혹해서 또다시 게임 콘솔을 구매하게 되었다.


'닌텐도 Wii'는 'Wii Fit'이란 타이틀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집에서 피트니스를 하고 게임을 통해 손가락뿐 아닌 전신 운동이 된다는 점은 세계적으로 이 게임기를 사야 한다는 명분을 주입시켰다.


'닌텐도 DS' 역시 우리나라에 들어오며 '매일매일 DS 두뇌 트레이닝' 같은 타이틀과 함께 시장을 공략했다.  게임을 하면 지능 학습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의 광고는 내가 아니라 와이프에게 명분을 만들어주었고 덕분에 가족들 모두 한동안 제대로 먹혀들었다.


처음 PC를 살 때는 '미래의 시대적 변화를 앞서 경험한다'는 명분


일본 발매판 플레이스테이션 2를 살 때는 '꼭 필요한 외국어 공부의 동기부여'에 좋다는 명분


닌텐도 Wii를 살 때는 '집 안에서도 몸을 움직여 운동하자'는 명분


닌텐도 DS를 살 때는 '학습과 지능개발에 도움 되는 다양한 타이틀을 이용하자'는 명분


단순화하자면 게임기를 사는 단순한 행동임에도 나는 저런 거창한 명분들을 달아서 나를 합리화했었구나 싶다.




지금 나는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 스스로와 타협하려 한다.


최근 10년여간 나는 게임기를 산 적이 없다.

스마트폰 성능이 좋아지면서 어느새 많은 모바일 게임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콘솔에서 이용하던 추억의 작품들도 모바일 게임으로 이식되면서 굳이 전용 게임기를 살 동기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스마트폰에서 플레이하는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은 인앱결제 방식의 수익 모델이 고착화되어 있다.  인앱결제란 게임 자체는 무료로 다운로드하여 이용할 수 있게 하면서, 게임의 진행이나 캐릭터 성장에 필요한 아이템을 앱 내에서 구매하게 하는 방식이다.


게다가 아이템을 구매할 때도 확률형으로 보상이 주어지는 가챠 방식이 대중적이다.

뭘 얻게 될지도 모르고 운을 바라며 확률에 따라 보상이 주어지는 가챠 시스템은 사람의 심리적인 욕구를 자극하여 현질(현금결제)을 유도한다.


1천 원, 2천 원 하는 소액의 가챠에 중독되어 마구 현질을 하다가 어느새 수만 원, 수십만 원을 쓰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할 때면 내가 게임을 하는 것인지 도박을 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한다.


나는 사회적 병폐라고 까지 치부되며 규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확률형 아이템 방식 모바일 게임의 지긋지긋한 중독적 게임 현질(현금결제)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명분을 찾았다.

일주일에 만원씩 현질을 할 바에는 차라리 '닌텐도 스위치+젤다의 전설'을 구해 플레이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게임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명분이 충분히 의미 있기에 이번에도 나는 명분을 쫓아 행동할 것이다.

절대로 게임기를 갖고 싶어 명분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며 주말에 서초동 국제전자상가를 들려보려 한다.


현질의 노예 같은 생활은 이제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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