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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Mar 22. 2024

아이에게 전하는 편지

살아오며 여러 일들을 겪고 경험해 보니

어릴 적 재밌게만 읽었던 동화 속의 이야기가 사실은 현실보다도 무서운 얘기였구나 느낄 때가 있다.

특히 현실 풍자적인 내용으로 교훈을 전달하던 안데르센의 동화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들고는 한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원제(原題)는 '황제의 새로운 옷'이라고 한다.

하지만 번안(飜案, adaptation) 과정을 거치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벌거벗은 임금님'이란 제목이 더 익숙해진 것이다.

어린이 대상의 동화 제목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버전이 오히려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 같기는 하다.


동화 속에서 새 옷을 좋아하는 허영심 가득한  임금님은 세계 제일의 실력이 있다고 얘기하는 재단사에게  새 옷을 지어올 것을 명한다.

사기꾼 재단사는 새 옷을 만들면서 옷감이 너무나도 고귀한 것이라 멍청한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옷을 제작하는 과정을 확인하러 간 임금님의 신하는 사실 재단사가 만드는 옷이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멍청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옷이 훌륭하다고 얘기한다.

다른 신하들도 혼자만 멍청해 보일 수 없으니 다른 사람들처럼 옷을 본 것처럼 말했고, 완성된 새 옷을 모두들 다 훌륭하다고 말하니 임금님도 옷이 보이는 것처럼 똑같이 행세한다.


그렇게 완성된 옷을 입고 거리를 행차하는 임금님을 보고, 한 어린아이가 소리친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래"


어릴 적에는 몰랐지만 이 광경이 마치 지금 시대의 기업 컨설팅을 보는 것 같았다.

컨설팅 회사가 제시하는 근사한 전략 보고서는 온갖 첨단 분석 기법과 해외 사례를 뒤섞어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내용 속에는 핵심적인 레슨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라는 후광을 입고 스스로는 책임지지 않을 전략을 제안하는 과정이 마치 재단사가 만드는 임금님의 새 옷과 겹쳐 연상되었다.


클라이언트 회사의 임직원들은 컨설팅 보고서의 한계가 눈에 보이고 현실적인 제약이 뻔히 보여도,

임금님의 신하들처럼 '역시~'를 남발하기도 한다.


동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임금을 속인 것은 재단사이니 신하들은 스스로의 책임은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회사에서도 컨설팅 결과에 대한 비판은 뒷담화로만 이뤄질 뿐, CEO 앞에서 결과에 대해 논쟁하는 경영진을 본 적 없으니 말이다.

 

이런 유사성을 살펴보면 동화는 미래의 현실을 반영하는가 싶다가도, 인간이란 원래 변함없이 나약하고 무책임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동화 속에서 뻔한 사실을 외면한 체 이어지는 집단적인 침묵은 거리 행차 중 한 아이의 외침으로 끝이 난다.

'임금님은 벌거숭이야'


나는 갑자기 거리에서 소리친 아이에 대해 궁금한 마음과 걱정스런 기분이 들었다.


현실 속에서 모두가 외면하는 사실을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는 지를 익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아이에게 짧은 편지를 써보고 싶었다.




아이야 너는 정말 정직하구나.


천진한 너의 눈에 보인 모습이 거짓일 수는 없겠지.

임금님은 그날 정말로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어.


그러니까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소리친 건 당연한 일이야.

벌거벗은 임금님을 봤으니 벌거숭이라고 하는 건

홍시맛이 나니 홍시맛이 난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당연하겠지.


그런데 아이야,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몰라서 침묵했던 걸까?


사실 다른 사람들 모두 임금님이 벌거벗은 건 알았을 거야.

근데 왜 아무도 임금님께 그 얘길 하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 사실을 이야기하다가는

화(禍)가 닥칠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일 거란다.


어쩌면 임금님 본인이 벌거벗고 있다는 걸 몰랐을 수도 있어.

그런데 누군가로 인해 그걸 알게 된다면 임금님이 얼마나 창피할까?

본인의 어리석음을 들킨 것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

그가 창피함을 모면하려 무슨 일을 할지는 모를 일이잖아?


또 어쩌면 임금님 본인이 벌거벗은 걸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옷을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누가 임금의 권위에 거스르는 지 알아보려 했을 수도 있어.


옛날 중국 진나라 시대에도 누군가는

사슴(鹿)을 보고 말(馬)이라고 해야만 살려준 적이 있었거든


그러니까 아이야

세상을 살아가며 앞으로 마주칠 다양한 순간 속에서

정직하게 항상 사실대로 말하는 게 너에게 도움이 될 지를

나는 알 수 없구나.


그래서 너에게 알려주고 싶었단다.

세상에는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사람도 있고

그런 말이 뭔지 눈치 살펴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그런 사람들 속에서

네가 지금처럼 순진하게 정직한 말만 한다면

혹시 따돌림 당하고 쫓겨날 수도 있어


당연한 말을 한 네가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할 지 모르겠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도 드네


그런데 네가 만약 그런 따돌림이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말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도 된단다.


가끔 후회될 일도 있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그리고 스스로를 속이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는

자부심은 가질 수 있을거야


네가 그때 소리친 이유로 험한 일을 당하진 않았기를 빌며


from 못난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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