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의 유튜브 쇼츠에 자주 추천 노출되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궁금한 마음에 원작을 찾아보니 마침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이었고, 제목은 '장송의 프리렌(葬送のフリーレン)'이었다.
장송(葬送)은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어 보낸다'는 뜻의 단어이다.
애니메이션 제목에 쓰이기로는 꽤나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어 작품의 정보를 알아보니
일본에서 각종 만화제(제14회 만화대상, 제25회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신생상, 제69회 쇼가쿠칸 만화상 수상)에서 수상한 이름난 작품이었다.
호기심에 나는 며칠 전부터 넷플릭스에서 '장송의 프리렌'을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작중 주인공인 '프리렌'은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엘프 종족 마법사다.
스토리는 동료(용사, 전사, 성직자, 마법사로 구성)들과 10년에 걸친 마왕 토벌을 마치고 영웅이 되어 개선한 프리렌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마왕을 무찔러 세상의 평화를 구한 후, 프리렌은 동료들과 50년 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마법을 수집하러 여행을 떠난다.
그때부터 50년의 시간이 흐르고 동료였던 용사 힘멜을 다시 만났을 때
엘프인 프리렌은 5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인간인 힘멜은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동료들과 다시 만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힘멜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장례를 치르며 프리렌은 후회의 마음과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엘프와 인간의 수명은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동료인 용사 힘멜에 대해 왜 좀 더 관심 갖고 알려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1,000년도 넘게 살아온 프리렌에게 마왕 토벌을 위한 10년은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인간인 힘멜은 프리렌과 보낸 10년의 시절이 어떤 의미였을지도 궁금한 것 같았다.
'장송의 프리렌' 스토리는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엘프 프리렌'이 과거의 동료인 '인간 힘멜'을 이해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으로 구성되었다.
마왕이나 용사, 마법사가 등장하는 흔한 이세계물(異世界物)에서는 권선징악(勸善懲惡), 성장서사(成長敍事), 복수(復讐)와 같은 전통적인 주제가 도드라졌다면, '장송의 프리렌'이 보여주는 스토리는 확실히 다른 작품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작품이다 싶었다.
애니메이션은 28회의 에피소드로 제작되어 시간 내어 정주행 하기에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엘프와 인간이 시간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차이가 있다는 설정은
내가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도 묘한 동질감(同質感)이 들었다.
회사에도 시간을 다르게 대하는 두 부류의 집단이 명확히 구분되어 존재한다.
임원(任員)과 직원(職員)이라는 집단이 그러하다.
세간(世間)에는 기업의 임원은 임시직원(臨時職員)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그건 임원의 경우 업무 성과에 따라 재평가를 받아 1년 단위로 고용의 재계약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반 직원에 비해 고용의 안정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입장이기에 임원과 직원은 일을 대하는 관점과 성과에 대한 강박(強迫)의 정도가 다르다.
통상적으로는 임원의 경우가 직원에 비해 훨씬 목표지향적이고 성과에 대한 민감도가 크다고 생각된다.
임원은 직원 중에서 업무능력이 뛰어나고 목표에 대한 민감도가 높은 사람들이 승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그런 판단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마다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절박하게 일해야 하는 임원의 판단은 오히려 직원의 판단보다 잘못된 결과를 만들어 낼 때도 많다.
임기 중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충분히 품질이 확인되지 않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하기도 하고
반대로 이미 알려진 문제가 커져가는데도 자신의 임기 중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감추는 경우도 생긴다.
길게 보면 두 가지 경우 모두 회사에 치명적인 위험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인데도 올해만 생각하는 임원에게 그건 큰 고려대상이 아니다.
임원들끼리 주고받는 얘기 중 내가 들었던 가장 토악질 나는 표현은 '대충해 어차피 그때까지 다닐 거야?'라는 얘기였다.
어차피 본인은 광만 팔고 사라지면 그만이지만 그 결과의 부정적 유산을 끌어안고 고생할 동료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현이다.
만약 임원이 스스로의 의사결정에 따른 책임을 오롯이 지게 된다면 과연 그런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까?
'프리렌'은 세상을 떠난 '힘멜'을 다시 만나 그를 이해해 보려는 마음으로
그녀의 스승인 대마법사 '플람메'가 남겨 놓은 '죽은 자와 대화하는 방법'을 찾아 여행한다.
이미 떠나간 누군가를 소환하여 다시 얘기해 볼 수 있는 그런 방법이 존재한다면...
그건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서도 비슷한 상황에서 한 번쯤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죽은 자까지 소환할 필요는 없지만 퇴사한 경영진을 찾아
'당신은 도대체 왜 그런 짓을 벌여놓은 것인가?' 하고 꼭 물아보고 싶다.
P.S.
시간을 대하는 생각이 다른 경우는 요즘도 참 많아 보인다.
헌법재판소와 탄핵된 행정부가 바라보는 시간이 그래 보인다.
탄핵된 누군가들은 직무가 정지된 상황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질 것 같다.
하지만 처분을 결정하는 헌재의 시간은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나라의 극심한 혼란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헌재도 그 원인과 과정에 대해 책임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프리렌'이 보여주는 호기심처럼 나와 다른 시간의 의미도 곱씹어서 어서 이런 혼란의 마무리가 다가오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