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육군 병장으로 26개월하고 보름 동안 근무한 후 만기 제대했다.
주특기는 100(일빵빵) 소총수. 흔히들 '땅개'라고 하는 가장 평범하고 흔한 주특기였다.
100 주특기이다 보니 신병교육대에서 6주간 기본 군사훈련을 받은 후, 별도의 주특기 교육 없이 자대로 배치되었다.
수도권에 위치한 어느 "동원 사단"으로 배치되었던 나는 대대 행정반으로 배속되어 "작전병"으로 일하게 되었다.
"동원 사단"은 부대를 구성하는 병력의 대부분이 상시 편성된 채로 운용되는 "상비 사단"과 달리, 평소에는 소수의 제한된 병력 만으로 부대를 운용하다가 국가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예비군을 소집해서 충원하여 정상적인 인원규모로 편성되는 부대였다.
그렇게 운영되는 부대이다 보니 부대는 적은 인원으로 운영되지만 행정 업무는 동일하게 존재했고, 오히려 예비군 동원 업무 때문에 행정업무가 더 많은 경우도 있어서, 행정반에서 근무하는 것이 절대 편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일주일에 너댓번은 야근을 밥먹듯 하고, 항상 잠이 부족한 상태로 훈련을 받다보니 태어나서 흘린 코피의 절반은 군복무 시절에 흘렸던 것 같다.
특히 화생방하의 전투준비태세 훈련이라도 하게 되면 방독면을 끼고 군장을 맨체 20kg은 될 것 같은 비문(비밀문서)상자를 들고 뛰어다니는 경우가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코피가 났을 때는 나중에 방독면을 벗었을 때 피와 땀이 뒤섞여 목까지 흘러내리는 처절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나는 명목 상 '작전병'으로 임명되어 대대 작전장교가 지시하는 여러 행정업무를 수행했지만, 상비사단의 행정병들이 행정업무의 분과에 따라 작전계원, 정보계원, 인사계원, 민심계원, 교육계원, 군수계원 등 다양하게 구분된 것과 달리 인사와 군수를 제외한 나머지 여러가지 분과의 일을 혼자 도맡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대대 작전병으로서 수도방위사령부가 실시하는 보안검열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우리 행정반으로 찾아 온 검열관인 기무장교는 나에게 우리 대대의 작전계획이 표시된 지도 관리상태를 보여 달라고 했었다.
한동안 작전지도를 살피던 기무장교는 뭔가 맘에 들지 않는 듯 얘기했다.
"야 일병! 작계지도를 이렇게 허접하게 관리하면 어떡해? 이 비닐도 좀 갈아놓고 해라 좀."
그는 지도 위에 덮인 비닐 케이스가 낡고 지저분한 것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짜증을 냈다.
"네 알겠습니다." 사령부 검열에서 기무장교에게 뭐라 변명해도 통할 리 없었고 얼른 시정하겠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무장교의 검열 지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야 정보계원한테 비합소(비밀합동보관소) 출입대장 가져와보라고 그래."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나는 비합소 출입대장을 가져와서 기무장교에게 전달했다.
"엉망이구만 이거 ... 이거 출입할 때마다 적은게 아니라 다 나중에 한꺼번에 기입한거 아니야 ?"
"아닙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크게 경을 칠 것 같은 분위기에 난 일단 우겨볼 수 밖에 없었다.
"이 새끼 이거 영창가야겠구만 ...."
기무장교는 내 대답이 가당찮다는 듯 혀를 차다가 이번엔 다른 주문을 했다.
"야 교육계원한테 연간 보안교육계획 가져와 보라고 해라."
"네 제가 교육계원입니다." 라고 대답한 나는, 내가 보기에도 허술하게 형식적으로만 정리된 교육계획을 제출했다.
기무장교는 교육계획표를 살펴 보면서 부대 일지와 대조하다가 뭔가 이상한 걸 또 찾았다는 듯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야 일병 교육계원 불러 오라니까."
"네 그게 접니다."
"그럼 정보계원 불러와 봐."
"네 그것도 접니다."
그제서야 기무장교는 우리부대가 동원 사단이란 걸 새삼 알았단 듯 물어봤다.
"너 작전계원 아니야 ? 너 혼자 다 한다고 ?"
"네 그렇습니다. 작전 교육 정보 민심계원입니다."
"그럼 음어(암호) 관리도 네가 하냐 ?"
"네 그렇습니다."
사령부에서 온 기무장교는 그후로 나에게 별 다른 질책을 하지 않았다.
타 부대에서는 서너명이 해야하는 일을 한명에게 맡겨 놓았으니 그냥 구색만 갖춰 일하는 것도 다행인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아무튼 덕분에 당시 보안검열에서 많은 질책을 받았지만 영창을 가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동원 사단의 행정병이었기에 요즘 여러 조직에서 흔히들 말하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멀티 플레이어"라는 것은 자신의 포지션이 아닌 '다른 포지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여러 포지션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하는 사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멀티 플레이어는 스포츠에서 '유틸리티 플레이어'라는 용어로 함께 쓰이기도 한다.
스포츠 종목에서 여러 포지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얘기한다.
예를 들어 야구에서 3루수로서의 수비 역량과 외야수 수비 역량을 모두 가진 선수가 있을 때, 그 사람을 수비에 멀티 역량이 있다고 하지만 한 선수가 동시에 3루수를 보면서 중견수로도 뛸 수는 없다.
조직 내에 멀티플레이어가 있다면 인력 운용 상 필요에 따라 적재적소에 인원을 운용하기에 편리해질 수는 있지만 9명이 할 일을 8명이나 7명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직이 개인에게 임무를 부여할 때에는 역할(Role)을 주고 그 역할에 맞춰 수행해야 하는 책임(Responsibility)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R&R은 조직에서 일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항상 그 적정성과 운용 상의 이슈를 찾아 해소해야 조직의 일이 제대로 수행될 수 있다.
그런데 조직원을 멀티플레이어로 육성한다고 하면서 절대적인 인원의 증가는 없이 역할과 책임만 더 부과하는 것은 멀티플레이어를 제대로 이해한 조치가 아니고 궁극적인 해결이 되는 일도 아니다.
10명뿐인 축구팀에서 필드 플레이어 모두가 공격과 수비에 능한 선수가 되더라도 축구팀은 11명으로 구성된다는 팀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소되진 않는다.
심지어 내가 근무했던 동원 사단의 경우에도 진짜로 비상상황이 되어 충원이 이뤄지게 되면 행정반의 인원이 보강되도록 계획되어져 있다. 그건 역할이 구분된 여러가지 업무를 한 사람이 모두 수행하는게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멀티 플레이어로서의 역량을 갖추는 건 물론 긍정적이고 격려받아야 할 일이다.
조직이 개인에게 멀티 플레이어 역량을 권장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일은 멀티 플레이어가 멀티 타스킹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해없이 활용되어진다면 멀티플레이어들이 그 탈렌트와 노력에 대해 충분히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