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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Sep 01. 2020

엄마를 도와 만든 잡채

할 일 없이 무료한 주말 오후.

마침 심심하던 참에 엄마가 저녁으로 잡채를 만든다고 하길래 돕겠다고 했다.


해본 요리라고는 계란후라이, 라면과 더불어 올초 캠핑 갈 때 해본 바지락술찜과 갈릭버터새우구이가 전부였다.

주방 보조로서 첫 임무는 당근과 적양파 채 썰기였다.

다치지 않게 칼질하는 법을 사사하고 신중히 당근 썰기에 나섰다.


본격적으로 채를 썰기 전에 채소를 손 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처음 치고는 채 썰기가 잘 됐다.


오후까지만 해도 진학, 진로 고민에 복잡하던 머리에서 잡념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당근 채 썰기를 마치고 적양파 썰기에 돌입했다.

동그란 양파를 반으로 가르고 썰기 좋게 뉘어서 써는 것을 언젠가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다.


음식에 솜씨가 있는 척해보려고 양파를 갈라 썰고 있는데, 엄마가 한 마디 한다.

"어디서 본 건 있네"


엄마로서는 요리를 돕겠다고 하는 내가 고맙기도, 또 웃기기도 했을 것이다.


첫 임무를 잘 완수하고 나니 곧 다음 임무가 주어졌다.

버섯과 시금치, 채 썬 당근과 양파를 볶는 일이었다.


억세던 채소에 뜨거운 열을 가하니 다루기 좋게 흐물 해지는 것을 보면서 사회생활을 상상해본다.

굽혀짐 없이 생그럽게 뽐내던 각자의 모습들이 치열하고 뜨거운 사회 현장에서 얼마나 빨리 녹아내리고, 또 유연하게 휘어지던가.


잡채 만들면서 채소나 볶고 있는 주제에 어이없는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채소를 볶고 있으니 엄마가 채소에 간을 한다.

역시 유연하게 휘어진 이들에게는 적당한 MSG가 필수다.



채소를 볶아 그릇에 담고 나니 세 번째 임무가 주어졌다.

당면을 삶는 일이다.


당면도 꼿꼿이 머리를 들더니 이내 물속으로 풍덩 빠져 다른 당면들과 무아지경으로 섞인다.

자기들이 펄펄 끓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또 머리 위에서 누가 휘젓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당면에게 또 감정을 이입하고 있는데 엄마가 간장을 붓는다.

아, 잡채에서 당면 색이 간장색이었지 참.

한 데 모여 끓고 있는 이들에게는 단 물과 짠 물이 필요한 법이다.


잡채 재료들이 다 준비되니 재료들을 한 데 섞어 볶으라는 명이 떨어졌다.

연약한 젓가락으로 저 채소 더미들을 언제 뒤집고 섞어서 볶고 있나.


심호흡을 하고 임무 완수를 위해 젓가락을 놀린다.

요령 없이 휘저으니 채소들이 엉기고 면발과 깨소금이 여기저기로 튄다.

등짝을 맞고 신중하게 젓가락 놀림을 가다듬는다.


드디어 완성된 잡채!

방구석에서 사회 걱정을 하며 만든 잡채라 그런지 맛이 감동적이었다.


구경만 하던 아빠가 와서 맛을 보더니 고생했다며 용돈을 준다.

잡채를 처음 만들었다는 조선시대 이총이 이 음식으로 임금을 기쁘게 하여 호조판서까지 지냈다고 하던데, 과연 그 효과는 현대 사회에서도 쏠쏠했다.


잡채 만드는 것을 도우며 몇 가지 생각을 얻는다.

1. 억센 이들, 꼿꼿한 이들, 굽히지 않는 이들. 자의든 타의든 치열한 데서 한번 끓고 나면 허리가 휠 정도로 유연해진다.

2. 유연해진 이들에게 MSG는 필수다.

3. 결과가 좋으면 보상은 따라온다.


다 같이 섞여서 지지고 볶으니 잡채 한 판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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