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기억에 남는 장애인을 만난 적이 두 번 있다. 첫 번째는 명동 한국은행 앞에서 본 시각장애인이다. 그 시각장애인은 본인이 어디에 서 있는 줄 모르고 있는 건지,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한복판에서 불안한 기색으로 걷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안해하면서 쳐다보기는 했지만 발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에 의협심도 없는 성격에 무슨 일인지 내가 나섰다. 다시 인도에 시각장애인을 데리고 와서 감사 인사를 나눈 뒤 서로 갈 길을 갔다.
두 번째 장애인은 합정역에서 만난 장애인 콜택시를 기다리는 장애인이었다. 걸을 수 없는 건지 휠체어를 타고 있던 그는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왼편으로 고개를 돌린 채 장애인 콜택시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심야 시간대라 나도 택시를 잡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그 장애인은 이미 코가 빨개져 있었다. 한참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양보하고 싶었지만 택시 기사가 휠체어 탄 장애인을 선뜻 태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또한 집에 빨리 가고 싶었던 심정이었음을 가식적으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얼마 전에는 다리를 절뚝이며 누추한 차림으로 골목길로 들어가는 장애인을 본 적이 있다. 나의 추측이지만 옷의 상태를 미루어보아 생활이 평안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새삼 장애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차별 주제를 배우다가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아닌, 현실에서 보는 일들을 통한 반성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보다 후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한다. 장애인의 하루도 똑같이 24시간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이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기다리는 장애인, 화장실을 찾는 장애인, 택시를 기다리는 장애인, 길을 잃은 장애인들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인색하기만 하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본인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사회 변두리로 밀려나게 된다. 변두리 수준이 아니라 거의 절벽 앞까지 밀려난다. 그리고 그들은 놀림거리가 되기도 하고, 욕지거리의 모티프로 쓰이기도 한다. 장애를 가진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사회가 무심해질 수가 있나 싶기도 하다.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시민단체가 외치는 구호의 영역으로만 영영 남겨지는 게 아닐까 싶어 씁쓸하다. 씁쓸한 사람은 많은데 움직이는 사람은 별로 없어 더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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