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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구 Oct 23. 2024

히로인 경화 09

경화의 동면






또다시 지연이 병실 안에서 눈을 떴다. 초능력 발현으로 인해 고열을 앓았던 그때처럼.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떠봐도 여전히 같은 천장이었다. 잠들어 있던 감각들도 뒤늦게 같이 깨어났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건조한 공기, 조용한 듯 소란스러운 바깥, 따끔거리고 쓰라린 상처들... 굳이 볼을 꼬집어보지 않아도 당연한 현실이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오니, 살아있다는 게 이토록 소중할 수가 없었다. 조용하지만 기쁜 눈물이 손등에 떨어졌다.

     

곧 완전히 정신을 차린 지연이 허리를 세워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으나, 꽤 오래 누워있던 모양이었다. 온몸이 뻐근했다. 지연의 기억은 부분 부분 잘려 있었다. 수형에게 납치를 당해 창고에 갇혔고, 그 창고에 불이 난 것은 기억나지만 본인이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두리번대던 지연이 병실 구석에 놓인 한준의 가방과 재킷을 봤다. 아빠가 병실에 같이 있다가 잠시 밖엘 나간 모양이었다.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깨어난 탓에 목이 너무 말랐다. 지연이 우선 한준을 찾으러 병실 문을 열었다.

    

“그래... 이번 주랑 다음 달까지 전부 수업 다 휴강으로 처리 부탁해. 학생들한테는 미안하다고 하고.”     


지연이 나온 줄도 모르고 한준은 정신없이 통화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웬만하면 소화하려고 해 봤지. 근데 딸도 그렇고 집사람도 그렇게 됐는데 내가 어떻게 학교에서 멀쩡히 강의하겠나...”     


한준의 말투는 축 가라앉아 있었다. 한준에게 말을 걸려던 지연이 멈춰 섰다.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가끔 보면 정말 황소고집이 있어. 집사람이... 내가 결국 말리지 못했지. 그렇게 해서 결국 딸은 구했지만... ”     


한준은 끝내 말을 못 잇고 흐렸다. 지연은 그제야 이 어색하고 허전한 느낌의 원인을 깨달았다. 평소 같으면 자신이 깨어난 것을 알고 제일 먼저 기뻐했을 엄마가 곁에 없었다.      


“... 그래. 고마워.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야지.”  

   

씁쓸하게 전화를 끊는 한준 앞으로 지연이 다가왔다. 놀라서 정신이 들었냐고 묻는 한준에게 지연은 왈칵 눈물부터 쏟았다. 자기 전화 내용을 다 들었구나. 곤란했다. 막 정신을 차린 애한테 안 좋은 소식부터 알리고 싶진 않았는데...      


“아빠... 엄마는? 설마 엄마가 나 때문에 잘못된 거야?”     


지연의 눈물에 한준이 착잡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경찰은 경화가 수형을 용의자로 지목한 것을 토대로 수형에 대한 위치추적을 실시했다. 공장에 불을 내고 도망치던 수형은 곧바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수형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시인했다. 경찰은 수형을 체포한 곳에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위치에 불이 나는 공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은 지연과 두 남자를 발견했다. 곧바로 지연과 남자들은 미리 출동해 있던 구급대에 의해 구조되었다. 연기를 많이 마시긴 했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그렇게 지연은 정확히 하루를 꼬박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그러나 경화는 아니었다. 지연의 무의식을 읽기 위해 모든 힘을 끌어다 쓴 그녀는 전원이 나간 전자기기처럼 한순간 픽 하고 꺼져버렸다. 호흡과 맥박이 모두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억지로 산소호흡기를 채우고 심장에 충격을 줘서 끊어지려는 경화의 목숨을 겨우 이어 붙였다. 하지만 그것 또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경화는 지연이 잠들어 있던 시간 동안, 치열하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고 있었다.      


“.....”  

   

고요하게 누워 있는 경화를 본 지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아침마다 자신을 깨우던 엄마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마르고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첫 번째로 무서웠다. 다시는 엄마가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 번째로는 자기 자신이 소름 끼치게 미웠다. 그냥 길 가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세상이 모두 원망스러울 지경인데, 이 모든 게 자신의 치기 어린 행동 때문이었다는 게... 지연은 끔찍이 후회돼서 죽고 싶은 심경이었다.      


“짜증 나... 일어나라고!! 왜 이러고 있냐고... 진짜... ”     


지연이 펑펑 울면서 경화에게 소리를 질렀다. 언제나 짜증내면 못 이기는 척해줬던 엄마가, 이번에도 짜증내면 없었던 일로 하고 깨어나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경화는 이번엔 지연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죽은 듯이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지연아, 안돼. 가자. 너 안정 취해야 돼.”

    

한준이 보다 못해 지연을 경화에게서 떼어냈다. 지연이 일어났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환자였다. 유독가스 때문에 기도며 폐며 멀쩡하지 않을 것이었다. 한준이 억지로 지연을 데려가는 와중에도, 지연은 악을 쓰며 서럽게 울었다. 불에 따갑게 그을린 목이 자꾸만 울 때마다 기침을 함께 뱉어냈다.                     







2주가 지났다. 지연은 하얀 얼굴로 경화의 병실을 지켰다. 여전히 경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딸이 옆에 와 있는데도 말이다. 지연은 경화가 아주 긴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늘 아침마다 아빠랑 나 밥 차려주느라 일찍 일어나야 했으니 오랜만에 푹 자고 싶은 거겠지. 그래, 봐줄게. 대신 조금만 자고 바로 일어나야 돼.      


탁자 위에 올려진 핸드폰으로 시선이 향했다. 수형이 위치추적을 피하기 위해, 고의로 저수지에 버린 본인의 핸드폰을 얼마 전 돌려받았다. 다행히 따로 고장 내지는 않았는지 충전을 하니 다시 작동됐다. 다시 켜놓긴 했는데 연락을 제일 많이 주고받던 엄마가 정작 누워 있으니, 쓸 일이 없어서 그냥 놔뒀던 것이었다. 어차피 학교에는 아빠가 다 사정을 말해놔서 따로 지연이 연락할 일도 없었다.

      

한참 핸드폰을 그냥 쳐다보기만 하다가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사실 그동안 핸드폰을 보지 않았던 건 무서워서였다. 엄마가 보낸 그 흔적을 차마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숱하게 왔을 문자들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지연은 엄마와 그렇게라도 얘기하고 싶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했을 문자들조차 너무 그리웠다.

         

‘너 어디야?’

‘너 진짜 엄마 이렇게 힘들게 할래?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이게 무슨 짓이야?’

‘전화 당장 받아’     


자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직후 엄마의 화난 문자들이 보였다. 미안한 마음에 지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최근 문자까지 거슬러 내려오던 지연이 고개를 푹 떨궜다.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다시는 너한테 함부로 텔레파시 쓰지 않을게. 엄마가 약속할게.’     


경화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지연이 소리 없이 숨죽여 울었다. 이번에도 엄마는 또 약속을 어겼다. 나한테 텔레파시 쓰지 않기로 해놓고, 결국 제멋대로 텔레파시를 써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또 나를 속상하게 만들지. 하지만 이번엔 엄마한테 결코 화내지 않을 것이다. 약속 어긴 거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눈 감아줄 것이다. 그냥 깨어나기만 하면 말없이 다 용서해 줄 것이다.

     

경화 옆에서 한참을 흐느끼던 지연이 눈물을 닦고 겨우 진정하려던 차였다. 잘못 본 것이겠지. 너무 간절히 바라서 헛것을 본 것은 아닐까. 지연이 경화를 보고 서둘러 눈물을 소매 끝으로 훔쳤다. 마른눈으로 다시 봐도 똑같았다. 경화의 손가락 하나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지연이 애써 눈물을 참고 눈을 다시 떴다. 자꾸 울면 시야가 뿌예져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방금 잘못 본 걸까? 반신반의하며 다시 경화를 쳐다보던 지연이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엄마!!”     


오랜 동면에서 깨려는 듯, 경화가 손을 옴싹거리고 있었다.                              







경화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바깥에 있던 한준도 한달음에 달려왔다. 경화는 막 깨어났지만 이런저런 검사를 받아야 해서 검사실에 들어가 있었다. 한준이 초조한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간 아닌척했지만 아내와 딸이 아프고 자신만 멀쩡했던 게 내내 죽을 맛이었던 지 비쩍 말라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교수님. 진짜 위험할 뻔했는데 부인분이 고비를 잘 넘기셨어요.”

“아유. 아닙니다. 선생님 덕분에... 진짜 너무 감사드립니다.”     


검사를 끝나고 나온 의사가 한준을 안심시켰다. 한준이 연신 의사에게 꾸벅였다. 이제 한숨 놓으려는데 의사가 한준을 진료실로 불렀다.     

     

“뭐 다행히 신체적 이상은 없습니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아내 분이 초능인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초능력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무슨 일이시죠?”     


자신의 상태가 어떤 지 전혀 모르는 경화는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사가 혹여 진료실 밖 경화에게 들릴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교수님이 워낙 초능인 쪽은 전문가시니까 잘 아시겠지만...”

“......”

“부인분의 초능력이 보이질 않아서요.”

“... 네?”


한준이 귀를 의심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 자체가 초능력때문인데 초능력이 보이질 않는다니. 그러나 의사는 단호하고 확실하게 덧붙였다.


“이경화 님이 초능력을 상실하셔서... 이젠 더 이상 초능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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