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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Feb 27. 2021

그때 어린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김정운, '에디톨로지'

근대 후기의 성과 사회는 각 개인을 끊임없는 '자발적 자기 착취'로 몰아넣는다. 넌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자기 계발서의 함정이기도 하다.

p.318


 근대적 개인의 문제가 심리학의 본고장인 독일에서는 여전히 사회구조적, 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논의되는 동안, 미국 심리학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다. 사회*문화적 구조와는 동떨어진 '진공상태의 개인'을 전제로 하는 패러다임이다.


 심리적 과정을 사회*문화적 과정과 역사적 경험의 내면화로 설명하려는 독일식 설명과는 달리, 미국식 심리학에서 전제하는 개인은 지극히 개별화된 주체다. 또한 이 개인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뤄낼 수 있는 전능한 주체'다. 근대 독일식 '규제 사회'와는 구별되는 미국식 '성과 사회'에 지극히 잘 어울리는 주체다.


 미국식 개인주의 심리학에서 극대화되는 후기 근대적 개인의 본질을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병철 교수는 '긍정성 과잉'으로 설명한다.


 +(중략)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을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라고 규정한다. 근대 후기의 성과 사회는 각 개인을 끊임없는 자기 착취의 나르시스적 장애로 몰아넣는다. 타인에 의한 착취가 아니라 '자발적 자기 착취'다. 끊임없이 발전해야 한다는 일원론적 발달과 성장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주체는 죽을 때까지 안정된 자아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런 후기 근대적 주체의 미완결적 성격은 자신을 태워버리는 번아웃과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프로이트 억압은 타율적 규율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부정성'이다. 슈퍼에고의 본질은 사회적 규율의 내면화이다. '~을 해서는 안된다''~을 해야만  한다'는 타율적 규제, 억압, 강제로 인해 끊임없이 불안감을 느낀다. '독일식 개인'의 모습이다. 


 반면 주체의 자율성이 극대화된 성과 사회의 본질은 '긍정성'이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미국식 개인'이다. 미국식 개인에게 나타나는 능력의 무한 긍정은 독일식 개인의 금지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이 한병철 교수의 주장이다. 끝 모르는 자기 착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항상 줄지어 있는 자기 계발서, 성공 처세서의 핵심은 아주 단순하다. '넌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는 속삭임이다. 여기에는 물론 또 다른 전제가 붙는다. '열심히 하면......'.

 아니 도대체 얼마나, 어디까지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인가. '넌 뭐든지 할 수 있어'는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와 같은 뜻이다. 결국 한도 끝도 없는, 이런 종류의 자기 긍정성은 우리 모두를 피로하게 만들고 맥 빠지게 한다. 


 근대적 개인의 일원론적 발달과 성장에 관한 이데올로기의 종착역은 후기 근대적 '우울함'이다.


 이사를 하면서, 다른 건 정리해도 책은, 책만큼은 정리하지 않았다. 책장이 모자랄 만큼 책을 사고 또 쌓아 올렸다.


 2년 전 읽지 않는 책을 쌓아보니, 100권이 넘었다.^^;; 그 책들은 한 때의 베스트셀러였거나, 서점의 잘 보이는 곳에 배치되었던 성공 처세서라고 하는 회사 생활에 관련한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이 난무한 책과 자기 계발서였다.


 25~35세까지 나의 독서는 너무나 소박(?)했다. 대학생 때는 소설과 수필만 읽었다면, 회사에 와서는 성공 처세서, 자기 계발서 위주로 읽었다. '국영수'에 집중하고, 그 외 과목을 멀리하는 수험생처럼. 어떤 계획이나 포부가 있어서 가까이했다면 좋았을 텐데, 실은 다른 이유였다. 


 회사에서 피곤한 인간관계와 업무에 치이고 또 치이면, 마지막엔 서점에 가서 '현명한 회사생활'과 관련된 제목의 책 몇 권을 들고 왔다. 읽는 동안은 상처에 반창고처럼 잠깐의 힐링이 되었다. 문제는 반창고가 출근과 함께 말을 듣지 않았다.


 책에서 읽은 것을 '단편 지식'을 적용하려던 순진한 나의 시도는 그렇게 상처를 덧나게 하고, 오해를 키우는 불씨가 되었다. 신입사원의 무모한 열정과 '나만 열심히, 잘하면 된다'는 책들의 조언은 나의 현실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실패와 반복을 거듭하고, 어느덧 과장쯤 되어서는 그런 충고와 조언의 글을 멀리하게 되었다. 연차가 올랐다고 현실을 이해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 책의 저자님들의 조언도 감사하지만, 모든 상황과 나의 상황이 일치할 수는 없다. 그리고 상황에 맞춰서 취사선택하는 쎈스라는 것도 그때에는 없었다. '사회적 무지'단계의 신입사원의 피곤함은 그렇게 길게 이어졌다.


 회사 생활이라는 곳은 처음 진입해 본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어떤 원리를 알려주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멘토며 롤모델을 찾고, 처세술 책도 읽고, 회사 선배들의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기꺼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선배들 말도 맞는 말보다 틀린 말이 많았지만, 그때는 스펀지처럼 모든 걸 흡수하려 했다. 

크고 작은 틀이 모여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내가 그때로 돌아가서 20대인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세상엔 거시적 관점이라는 큰 틀과 미시적 관점이라는 작은 틀이 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모를 때, 다른 사람의 눈으로 확인하지 말고, 너의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답답해도 잠시 멈추라고. 기다려보라고.


 타인에게 의지하는 건 쉽다. 하지만 타인은 그들의 눈으로 기준선을 만들고, 그들의 편의대로 상황을 해석한다. 그 세상은 본질을 흐린다. 기준선부터 틀렸으니깐. 


 만일 책을 읽고 싶다면, 회사와 관련 없는 소설이나 심리학 책(거시적 관점)을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서 다른 틀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다른 관점에서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자기 계발서나 처세술 책(미시적 관점)도 도움이 될 거라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그때의 나에게 말해보고 싶다.


 세상에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으로 나누어져 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나의 의지로 바꾸어 나갈 때, 수많은 내 안의 불평과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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