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영, '괜찮아, 안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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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결과가 나왔다. 고만고만한 검사 수치들 가운데 문제가 될 여지를 보인 것은 간 기능 이상. 며칠 후 다시 온 그에게 평소 건강식품이나 술, 복용하는 약이 있는지 등을 물었다. 매일 마신단다, 술을 왜? 힘드니까. 검사 결과가 나왔다.
나는 매뉴얼에 입각해 간 기능 이상 소견에 대해 꼭 필요한 설명을 하고 추가 검사들을 진행했다. 추가 검사의 결과는 다행히 간염이 아니라 알콜성 지방간 정도였지만, 투철한 직업정신을 발휘해 '이런 식으로 계속 술을 마시다간 간경화, 간암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라는 매뉴얼에 따른 설명도 빼먹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난 후 그는 약속대로 다시 왔다. 간 기능 검사를 다시 한 결과, 정상은 아니지만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요즘에는 술을 얼마나 마시냐'라고 묻자 그는 예의 수줍은 표정으로 '매일 마시던 것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줄였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더니 가뜩이나 액면과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표정을 더 수줍게 지어 보이며 뭔가를 부스럭거린다.
"덕분에 술을 많이 줄였더니 돈이 굳어서요. 아직 따뜻하니까 식기 전에 드십시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토스트 한 조각. 할매들이 그랬으면 0.1초 만에 자동적으로 '뭐 이런 거 사 오고 그래요. 담부터는 사 오지 마요.'라고 했을 텐데, 내 또래의 그에게는 웬일인지 그 익숙한 리액션이 나오지 않아 그저 말없이 고객만 숙인다. 물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드립을 또 치고야 말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마시던 술도 마저 끊고, 다음번엔 토스트 두 개 사다 주세요."
남자는 웃으며 알겠다고 답한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몸도 좋아지고 기분도 좋아지고, 예전보다 훨씬 덜 힘들다는 말을 덧붙인다. 전에는 사는 게 힘들어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하루도 견디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조금씩이지만 세상도 본인도 괜찮아지는 것 같다고 한다.
- 중략 -
그래도 토스트는 너무 맛있었고, 커피 역시 최근에 마신 커피 중 최고로 맛났다. 아마도 '이미 충분히 괜찮은' 누군가의 마음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웃고 싶어 졌다.
8월 햇살에 바삭해진 흙처럼 요새 마음이 건조하고, 조금의 부드러움도 남아 있지 않은 날이다. 웃어 보고 싶었다. 웃고 싶어서, 재밌는 개그맨 영상을 찾아봐도 평소처럼 즐겁지 않고,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우연히 팟캐스트에 소개된 이 책의 내용을 듣고 바로 전자책을 구매하고, 읽다가 그만 스르륵 마음의 문이 열렸다. ㅎㅎ 이 책은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동네 병원을 시작하고 난 후의 에피소드를 모은 책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풋'하고 웃어버리고, 읽다가 돌아가신 할머니도 생각났다. 에피소드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영상으로 그려지는 그런 마법이~
매일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다 보니, 불안과 분노, 그리고 우울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뒤덮었을 때, 햇살처럼 다가온 글이었다. 아름다운 미사여구도, 화려한 사진도 없지만 투박한 언어와 표현에서 느껴지는 찐한~정, 초코파이로도 전할 수 없는 마음, 읽는 동안 자꾸 미소 짓게 되었다.
이미 괜찮은 그런 기분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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