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림보

이 도시와 헤어질 결심

by 그럼에도

이사 일주일 전 마음이 다급해지고 어딘가 바빠진다.


일주일에 한 번 돌리던 세탁기를 이틀에 한 번씩 돌리고 있다. 다시 이사 갈 집은 작은 용량의 세탁기로 이불 빨래가 불가능하다. 이불 외에도 여러 모로 작고 불편해질 예정이다. 베란다가 있는 집에 살 때,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불을 모두 꺼내서 빨고, 널고, 며칠 안된 옷까지 계속 빨고 널고를 반복하고 있다.


갑자기 피아노 건반 몇 개의 소리가 이상해졌다. 소리를 듣는 귀가 밝아졌는지, 미세하지만 쇠가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피아노는 이사 직전에 급하게 조율을 받았다. 돈 되지 않는 스케일링을 자주 받으러 오는 데도 늘 친절하게 양치법을 설명해 주시는 치과도 다녀왔다. 코로나 백신 추가 접종도 했다.

서울보다 저렴한 이곳 원단시장에서 이사 갈 집의 커튼도 새로 맞췄다. 원단값은 비슷할 텐데 아마도 공임의 차이인 것 같았다. 혼자 원단을 고르는 내 옆에 신혼부부로 보이는 커플이 왔다. 신혼부부가 고른 원단을 보니, 10년 전에 내가 골랐던 원단과 비슷했다. (원단시장에 있는 커튼집은 원단을 고르면, 원단을 원하는 형태의 커튼으로 재단해주신다)


나 혼자의 추측 또는 가설을 말하자면, 부동산에 집을 보러 가면 가장 좋은 집부터 시작해서 저렴한 집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 원단시장은 반대로 가장 저렴한 원단부터 그다음으로 보여주신다. 10년 전 처음 왔을 때, 나는 가장 처음 보여주신 원단 그대로 골랐다. 그리고 아주 만족해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사장님 추천을 받지 않고, 원단 책에서 직접 원단을 골랐다. 벽지와 어울리는 색을 고심해서 골랐다. 부디 실물도 예쁘길 바라면서.


정작 이사 갈 사람의 가장 큰 준비인 '버리기'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 이사가 며칠 안 남았음에도 도저히 비워내질 못하고 있다. 해야 할 일들은 쌓여만 가는데 마지막까지 미루는 나의 심리는 무엇일까?


심리학 책에서는 나처럼 마지막까지 미루는 사람을 '게으른 완벽주의자'라고 했다. 내가 보기엔 그냥 게으름뱅이에 불과한데...


그러고 보면 나는 사람도, 감정도, 물건도 비워내지를 못한다. '쿨한 감성'은 없고 쌓아두는 지질한 감성만 가득하다고 할까? 이번 기회에 책장 한편에 쌓아둔 언제가 쓰려고 모아둔 축하 봉투, 카드, 트로피, 쓰다만 공책, 그 외에 쓰지 않는 문구류 한 가득을 비워낼 마음만... 한가득이다. 실제로는 움직이질 못하고, 한숨만 쉬고 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비워낼 것인가?


이사 전 마음은 설렘보다 귀차니즘과 피곤함이 한가득이다. 내가 미루고 또 미루는 합리적인 이유... 다음에... 이사 날짜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미룰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치 시험공부를 안 한 학생이 시험 일주일을 남기고 조급해하는 것과 같았다.


이 도시는 지금 집주인만 빼면 나름 재밌고, 즐거운 공간이었다. 이것저것 합리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공간도 가까웠고, 문화행사도 많았다. 그리고 도서관이 특히 완벽했다. 아마도 가장 생각나지 않을까? 그렇게 도시와 헤어질 준비와 결심을 하고 있는 주간이다.


다음 세입자를 못 구하고 나간다는 부담감과 압박만 느끼고 해야 할 일들을 미뤄두고 있었다. 이사 갈 집의 공사도 챙겨야 하고, 점검해야 하는데... 난 참 뭐가 하나씩 빠지는 허술한 구멍이 많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식탐은 변함이 없고, 세 끼를 잘 챙겨 먹는다는 아이러니!


쿨하게 헤어질 수 있을까? 쿨하게, 꼼꼼하게 이 도시와 헤어질 준비 중이다. 다가올 일들과 새로운 업무 그리고 반려견들의 건강을 옆에서 챙겨야 하니까. 새로움은 불안과 피곤함을 한 세트로 데리고 다닌다. 어떻게든 되겠지. 되게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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