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까지 생각했다.
13개월간 평화롭게 살던 집을 떠나려 한다. 내리고 있는 이 동네 시세와는 반대로 집주인은 다음 계약부터 월세를 올려버리겠다고 선포했다. 집 계약이 11개월이 남았기에 다음 세입자를 구해야 하는데 집주인의 적극적인 방해로 구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화장실 여기저기에 문제가 더 커졌다. 천장 누수는 지난주에 위층 도움으로 고쳤는데 이제는 다른 곳에서 물이 떨어졌다. 오래된 욕조는 페인트가 벗겨져서 조각들이 하수구에 꽃가루처럼 떨어져 있고, 실리콘은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지 오래였다.
이사 오고 한 번은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내서 상황을 알렸지만 대응은 없었고, 나 역시 참고 살고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다음 세입자를 구하는 데 있어서 화장실 상태는 엉망이고, 월세는 시세보다 비쌌다. 거기다 동네에 매매가 잠기니 전월세 물건이 늘어나고 거기다 시세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만 역주행하고 있었다.
기가 찼다. 내일 이사 전에 집주인에게 최후통첩 같은 문자를 보냈다. 사진과 필요한 수리 내역을 보냈고, 임대인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딱딱한 문자를 보냈다. 처음이었다. 집주인은 늘 '읽씹' 모드였는데 이번에는 답장이 왔다. 시간이 되면 오겠다고 하셨다. 워낙 말이 바뀌는 모습을 보아왔기에 바로 시간을 확정하자고 답문을 드렸다. 정말 오셨다. 거기다 아이스크림 콘을 3개나 사 오셨다.
그동안의 집주인 모습에서 있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답문이 오고, 방문을 하고, 아이스크림을 사 온다는 것은. 그동안의 행동이 있으니 '고맙다'라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법률구조공단 상담에서는 괜히 '내용증명'같은 걸 보내서 집주인 성질 건드리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셨고... 난 그 말씀을 충실히 이행 중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어쩌면 11개월을 꼬박 빈집에 월세를 내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내용증명을 하든, '수선 의무'를 다하지 않고, '다음 임차인이 될 사람의 연락을 회피'한 적극적 방해를 내세워 승산이 적어도 해볼까 결심을 하게 됐다.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소송을 대비해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집주인이 오셨다. 거기다 화장실을 수리하겠다는 이야기까지 하셨다.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고 손을 내저으셨던 분이 무슨 일일까? 기다렸다는 듯이 시세와 동떨어진 집세를 말씀드렸다.
아, 역시 달라진 건 없었다. 시세보다 비싸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다시 딱 잡아떼셨다. 이미 동네 부동산과 통화한 것도 알고 있고, 옆에서 들은 적도 있는데... 시치미 연기가 시작되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었구나.
아주 잠깐 희망이 생길 뻔했지만 다시 원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열 군데 이상의 부동산을 다녀본 소감은... 아무리 세입자에게 친절해도 부동산은 집주인 편이다. 세입자는 한 번 오고 떠날 사람이지만 집주인은 오래 상대해야 할 VIP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집주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완이 좋은 부동산은 중재라는 것도 하지만 지금처럼 매몰찬 집주인을 만나면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집을 볼 때 집주인도 고려했어야 했다. 문제가 생겨도 잘 안고쳐줄 사람이었는지, 약자가 되었을 때 이렇게 횡포를 휘두룰 줄 알았다면...
지금의 시기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파도를 건너는 법을 알게 될까?
요새 나는 집주인 악당들에 둘러쌓여서 많이 어두워져 있다. 세상에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닌데 어두운 면만 보다 보니 나 역시 물들어가는 느낌이다. 이런 굴레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서 색연필을 집어든다. 밝고 화사한 색만 골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