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림보

가시덩굴

by 그럼에도

10월 초부터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는 악당이 있다.


악당의 정체는 부산 집주인이다. 나는 분명 10월 2일에 다음 세입자를 이야기했고, 집주인은 부동산을 이틀간 돌며 시세 확인을 했다. 나와 한 계약 내용 그대로 유지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3주 만에 약속을 깨버렸다. 그것도 내가 새로운 세입자를 구해온 다음 날, 집주인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월세를 10만 원 더 올리겠다고 통보했고, 다음 세입자는 황당해하며 사라졌다.


집주인이 올린 시세는 시세와도 집 조건과도 거리가 멀었다. 부동산 소장이 아무리 설득해도 '그건 세입자, 니 사정이다'라며 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연락을 받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아무리 사정해도 매몰차게 거절했다.


어이가 없는 건 나였다. 집주인은 약속을 깨기 일주일 전에 집 상태를 보겠다고 놀러 오셨다. 한 시간 넘게 담소를 나누고, '이렇게 괜찮은데 왜 결혼을 안 했느냐'며 걱정을 하고, 집안 살림살이 하나하나를 물어보고, 마지막엔 커튼이 예쁘다면서 집주인이 내가 사는 집으로 이사 오게 된다면 '저 커튼을 싸게 나한테 달라'면서 애교 섞인 멘트와 부담스러운 눈빛을 날렸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고 며칠 후 부동산을 통해서 들었다. 집주인이 찾아간 점쟁이의 반대로 집주인이 들어오는 건 없던 일이 되었다고. 당사자인 나에게는 비밀로 하고 부동산에게만 말했다는 건 어이가 없지만 조용히 넘어갔다.


그렇게 화기애애함의 대가는 '배신'이었다. 집주인을 근 두 달간 자세히 살펴보니 전형적인 '강약약강'이었다.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강자에게는 고개를 납작 엎드릴 만큼 약했다. 그런 집주인에게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눈 나는 바로 '만만한 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공격이 시작됐다.


집주인이 내 전화뿐만 아니라 부동산의 전화를 받지 않아서 다음 세입자를 구하는 게 더 어려워졌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에 법률구조공단과 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도 찾아갔다. 물론 결론은...'계약이 도래하지 않은 관계로 세입자가 참아라'였다. 임대인이 너무한 것은맞지만 법률 위반으로 걸기에는 부족하다고 했다.


'내용 증명'이라고 보내고 싶은 마음은 참았지만 집주인이 부동산 연락을 받지 않는 자세는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문자로 보냈다. 문자 확인 후 집주인은 부동산 연락을 받는다고 했다. 대신 부동산의 연락에는 어떻게든 빗나간 대답을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보증금을 더 올리고, 집세를 내리려고 부동산에서 연락을 하면, 현재 월세 비율과는 맞지 않는 동떨어진 금액을 불러서 번번이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즉, 내가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전화 연락에는 응했지만 월세 금액에서 말도 안 되는 대답으로 피해 가고 있었다. 집 보러 오는 사람도 없는데 오기도 전에 쫓아내는 건 뭘까?


부동산 두 곳의 소장님, 즉 집주인과 평소 오랜 거래가 있는 사장님이 말도 안 되는 월세에 대해서 조율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부동산도 포기하고 말았다. 포기하지 못한 사람은 세입자인 나 밖에 없었다. 그런 갑질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열 군데 이상에 집을 올리고, 두 배의 복비를 약속하고, 몇 번이나 간절하게 부탁을 드렸다. 그때 내 마음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해보자'였다. 설령 남은 열한 달 계약기간을 빈 집으로 둔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해보면 아쉬움이 없을 것 같았다.


월요일 아침 이삿날이었다. 전날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는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났다. 이사 준비를 하고, 간단히 아침을 먹으려는 데 한 입 먹고 나니 도저히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피곤함을 잊으려 평소에 먹지 않던 에너지 음료를 마셨다. 커피도 마셨지만 부족한 카페인 보충을 위해서.


이삿짐 차가 출발했는데 정작 나는 출발하지 못했다. 다시 집 앞 부동산에 가서 이사 소식을 알리고 또 간곡하게 부탁드렸다. 이미 집주인에게 질린 부동산 소장님은 '그 집은 거래하기 싫다'라는 말로 내 마음에 구멍을 내셨다.


이사보다 부동산 소장님의 한 마디가 더 힘들었다. 그럼에도 몇몇 부동산에 집이 공실이 되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물론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렇게 차를 몰고 경부고속도로를 올라가는 길... 집주인의 전화를 받았다.


"앞으로도 잘 지내길 바란다~그런데 짐은 왜 놓고 간 게 있어?"라는 해맑은 목소리였다. 며칠 전 들었던 한 부동산 소장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 집주인 워낙 이상해서 이사하자마자 집 사진이랑 동영상 남겨놓고 CCTV 꼭 설치하라는 말씀과 집주인 성격 상 몰래 다른 세입자를 들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왜 슬픈 생각은 틀리지 않을까?


진짜 그랬다. 집주인은 내가 이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 방문했다. 그리고 내가 말했던 위층 누수를 확인하면서 보증금도 받지 않은 나보고 '굿바이'를 외치고 있었다 ㅠㅠ


모든 피로가 한 번에 풀리고 온 몸의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직 보증금 안 받았어요. 그리고 아직 임대차 계약 중이에요!" 누수 공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집주인에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었지만 찜찜함을 넘어서 그동안 억누른 분노가 솟아올랐다. 내가 어떻게 서울톨게이트까지 차를 몰고 왔는지 기적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쩌면 그 집은 내년까지 비워 놓아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틀 후 기적이 또 일어났다.


집주인과 친밀함이 남은 유일한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소장님이 집주인에게 했던 이야기 중 하나로 결국 내가 살던 시세 그대로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집주인이 예비 세입자를 쫓아낸 지 한 달의 일이었다. 집주인을 설득한 메시지도 알려주셨다.


집주인에게 소장님은 그 전에도 많은 이야기로 설득을 했다.


지금 집 시세가 그렇지 않다. 인테리어도 안된 낡은 집이다.

내 말 듣고 그동안 잘못된 적 있나? 왜 내 말을 안 듣나?(집주인의 재테크 관리를 하고 있는 부동산임)

아가씨 서울 간다. 이러면 안 된다.

남한테 그리 못되게 하면 니도 좋을 거 없다.

지금 더 좋은 집도 같은 가격에 공실이다.

부산 사람들은 남향집만 좋아하는데 그 집은 동향이라서 더 인기가 없다.

"지금 그 집 상태면 내년에 지금 세입자랑 계약 끝날 때쯤이면 네가 부른 시세보다 20만 원 더 내려도 안 나간다. 그럼 그 시세로 2년 가고... 그다음은..."


그 어떤 말에도 무반응이었던 집주인은 마지막 메시지에 반응을 했다. 집주인의 계획은 이랬다. 나에게는 빈 집을 계약기간 내내 월세를 받고, 거기다 장판이 눌린 부분까지 찾아내서 그 부분을 청구하려 했으며, 이사까지 간 사람이 CCTV까지 설치한 괘씸함을 이야기하러 부동산에 갔다가 역으로 설득을 당했다.


지금 월세도 전세도 시세가 내려가는데 내년 말이면 훨씬 더 떨어질 거라 2년간 손해를 볼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세입자 그만 약 올리고, 원래 시세대로 내놓고 다음 세입자를 구해야 집주인도 손해보지 않는다는 계산이 집주인을 움직였다.


돈이 종교인 사람에게는 그 어떤 양심, 시세, 이미지나 동네 평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현재와 앞으로 입게 될 손해가 집주인을 움직였다. 나는 이번 일로 사람에 따라서 어떤 메시지가 효과적인지를 하나 배웠다.

물론 지금 시세가 나날이 내려가고 있기에 현재 나의 조건으로도 다음 세입자를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원래 시세로 돌아온 것만으로 넘어야 할 산의 반을 올라온 기분이었다.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길은 가시덩굴 속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시덩굴의 절반쯤 올라왔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한 걸음씩 올라갈 것이다. 인생은 가까이 서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가슴에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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