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림보

부동산 소장이 오늘 일은 비밀로 하라고 말했다

by 그럼에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어제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비어있는 부산집에 단기임대를 주는 게 어떠냐는 전화였다. 비어있기는 하지만 임대인인 집주인의 동의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나는 5천만 원에 60만 원 월세집을 가지고 있다. 서울발령으로 올라왔지만 남은 계약 기간의 월세를 내는 중이었다. 10군데 넘는 부동산에 집을 내놨지만 몇 번 집을 보러 오지 않았었다. 집을 내놓고 얼마 후 다음 세입자를 구할 뻔했었다.


행운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집주인이 잠수를 탔다. 전화와 문자 모두 응답하지 않고 있었다. 연락받지 않아서 계약금을 보내지 못하는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이틀이 지나서 집주인 전화가 왔다. 갑자기 집을 보러 온다고 하더니, 월세 10만원을 더 올리겠다고 큰 소리를 질렀다. 이 가격이 아니면 계약하지 않겠다고. 배짱이었다. 어차피 계약기간은 1년이 더 남았으니, 계약이 깨져도 현 세입자가 내면 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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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는 좋지만 30년 된 구축에 인테리어 한 번 하지 않은 집, 거기다 근처 매물이 넘치는 상황에서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당연히 계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음에도 몇몇 부동산에서 보증금을 올리고, 월세를 낮추는 방향으로 몇 번이나 연락을 했지만 집주인은 전화를 받지 않거나, 받아도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해서 부동산이 다음 연락을 못하도록 했다.


집주인은 일흔을 넘기고 너무나 왜소해서, 작은 바람에도 날아갈 것 같은 할머니다. 부산말로 할머니는 할. 할매. 할매는 대단했다. 알고 보니 동네에 소문난 악당이라 거래하지 않는 부동산이 있었고, 상가 자리에서 월세도 많이 받는 동네 부자할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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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할매는 계약 기간을 남긴 채 집을 내놓는다고 하니, 동네 부동산 열 군데 이상을 돌아다니며 시세를 확인했다. 현재 금액에서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시세 유지를 인정했었다.


그런데 일주일 후 집에 갑자기 놀어오더니, 집주인이 들어와 살겠다고 했다. 또 그러다 점괘가 안 좋아서 이사를 안 한다가 했다가(이것도 말하지 않아서 부동산에 가서 들었다), 세입자를 구하니 금액을 갑자기 올려서 계약을 막고, 다음 부동산 연락을 안 받았다.


할매는 양아치였다. 게임을 하듯이 이 상황을 재밌게 즐기고 있었다. 더 글로리의 '연진'이 같았다. 재밌어하고, 그러면서도 보고 싶어 한다고 할까. 이사 가기 전날에는 말도 안 되게 아이스크림 3개를 들고 왔다. 내일 이사 선물이라고 했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


발령으로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하게 됐다. 아이스크림 선물을 받은 다음날, 집주인은 오래된 장판이 눌렸다며 변상을 하라고 난리를 쳤다. 거기다 빈 집인 줄 알았는데 CCTV를 설치했다는 것을 알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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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단지 부동산에 집을 내놓으러 갔다가 들었다. 워낙 질이 안 좋은 집주인이다. 할매는 빈 집에 몰래 세입자를 받을 사람이니, 꼭 CCTV를 설치하라는 사장님 말씀을 듣고 눈에 띄지 않게 설치했었다.



올해 집 보러 온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그것도 한 부동산에서 온 손님들이었다.


그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매매로 잠시 머물 집이 필요한 사람인데, 3개월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금액은 50만 원씩 해서 딱 150만원(보증금 300만 원)에 빌리겠다고 했다. 부동산은 잘 모르지만 뭔가 이상했다. 원래 단기임대라고 하면 원래 월세보다 더 큰 금액을 내는 것이 아닐까?


부동산에서는 이 동네에서 가장 상황이 급한 사람이 나라고 했다. 이 가격이 싫으면 다른 데가 있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생각해 보면 이미 봄철 이사 기간은 끝났고, 비워두느니 단기 임대라도 감사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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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조건을 집주인이 이해할까? 본인에게는 도움 되지 않고, 임차인인 나에게만 유리한 상황에 동의할 집주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 놀랍게도 집주인은 바로 전화를 받았고, 승인했다.


올해 할매 목표가 '착하게 살기'였을까? 작년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당황한 건 나였다. 그리고 오늘 부동산에 단기임대로 올 사람이 왔다고 했다. 부동산 사장님은 단기 임대로 올 사람은 oo아파트를 팔았고, 인상이 너무 좋은 사람이라며 영상 통화를 한 번 보는 게 어떠냐고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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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당황스러웠다. 인상이 좋다고 영상통화를 꼭 해야 한다고? 엄마하고도 하지 않는 영상통화를 처음 보는 여자와 하다니... 다행히 부동산 소장님 폰과 아이폰은 영상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임대차계약에 또 다른 임대차 계약을 하는 게 '전대차'계약이라는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나라는 사람은 나이는 많지만 세상 이치에 무지했다. 그런 전대차 계약 내용을 문자로 보내왔다.


점심시간이었고 아주 멍한 상태에 무심히 문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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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인 OOO의 동의하에 전대차계약은 진행되며 현임차인이 임대인이 갈음하는 계약의 진행으로 모든 책임여부는 현임차인께 묻기로 한다. 전대차계약 만료 시 2023년 7월 17일 현임차인(나)은 새 임차인께 보증금 300만 원을 반환키로 한다.
임대인 OOO의 동의하에 전대차계약은 진행되며 임대기간의 모든 책임 여부는 현임차인에게 있다. 기존 임대차기간 만료 후에도 전대차인이 이사 나가지 않을 시에 발생하는 모든 책임 여부는 현임차인이 지기로 한다.
- 오늘 오후 1:31 부동산에서 온 문자 내용 -


언뜻 봤지만 전화 통화와는 내용이 달랐다. 3개월 임차 기간 동안 생기는 파손이나 내용은 단기임차인이 부담하기로 했는데 그런 내용은 하나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리고 부동산에서 어제와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3개월 임차지만 한 달 더 살 수도 있다는 내용을 말하면서 나의 의향을 물어봤다. 9월 30일까지 계약이 남아 있지 않냐면서.


이야기를 듣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누가 150만 원 받으면서 이런 내용에 계약을 해요. 모든 책임이라니? 이게 법적으로 얼마나 무서운 말인데! 임대인 OOO 또 장난쳤네. 나 이 계약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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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폭발했지만 오후 근무가 나를 기다렸다. 일을 하면서 처음에는 양아치할매가 어이가 없었다. 빨간색으로 적힌 저 문구를 양아치할매가 꼭 넣어야 한다고 했다는 말에. 그러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전화도 안 받는 집주인이 갑자기 전화를 빨리 받고, 오늘은 부동산에 한 걸음에 달려오고. 부동산은 계약조건과 상관없는 단기임대할 사람의 인상과 인성이 좋을 것 같다는 TMI 멘트에 영상 통화라니?


뭔가 짜고 치 고스톱판에 내가 들어온 것 같았다. 지나치게 달콤했고, 지나치게 상황을 한쪽으로 몰아갔다. 그들은 나의 보증금을 흔들고 싶어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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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49분에 부동산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웬일일까?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우선 오늘 상황을 사과했다. 원래 그러면 안 되는데 집주인 할매가 와서 이상한 문구를 넣겠다고 우기고, 사무실에 한참을 소리 지르며 '은, 는, 이, 가와 같은 조사 하나하나 점검 후에, 나에게 문자를 보내라고 했다니!

그럴리가


그러니까 오늘 상황에 본인은 너무 놀랬다고, 피해자인 것처럼 말했다. 차 막히는 퇴근길, 운전 중에 얼떨결에 나는 그런 부동산을 위로했다. 집주인 할매 인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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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한테 부동산 소장이 나한테 문자를 보낼 때, 집주인할매도 부동산에 있었다고? 문자의 조사 하나하나까지 검열 했다고??


전화를 끊을 때쯤 '싸한~'느낌이 스치고 갔다. 부동산 소장이 오늘 일은 꼭 비밀로 해달라면서 전화를 끊은 것이다. 본인도 피해자라면서, 왜 오늘 일은 비밀로 해야 한다는 거지? 보통 이상한 집주인 이야기는 동네 부동산 소장님들 수다방 단골 주제가 아닌가?


'짜고친 고스톱, 사기 사건에 휘말리는 거 아닐까?'라는 의심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부동산과 집주인이 짠 게 의심이 아니라... 진실이었구나.


싸한 감성에 부동산은 찬 물을 한 번 더 부었다. '어차피 9월 30일까지 집은 비워있을 테니, 다음 세입자 구할 생각은 말라고. 9월에 보증금 잘 받으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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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탐대실'. 빈집에 내는 월세를 좀 아끼려다가 보증금을 다칠 뻔했다. 거기다 약점을 잘 알고 있었던 부동산과 집주인은 이번 기회에 나를 한 번 더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내가 양아치할매를 만나서 작년 10월부터 올해 4월까지 겪은 이야기이고, 현재진행 중의 이야기다.


할매는 돈이 많고 시간이 많고 에너지는 넘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사람을 가지고 장난을 칠까? 그렇게 살아서 부자가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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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된 비법은 알 수 없지만 악당이 되는 새로운 방법 하나를 또 배운 날이었다. 아! 전대차라는 단어도 오늘 점심시간에 처음 들어보았다.



[ P.S : 너무 긴 글을 올린 이유는 혹시나 나와 같은 사례를 누군가 경험할까 싶어서입니다. 불황이 심해지고, 숨어있던 악당들이 더 난리를 치겠죠. 그리고 세상사에 순진한 누군가는 걸려들 테니까요. 어쩌면 또 다른 나를 위해서, 그리고 오늘 승인 직전에 악당에 넘어가지 않은 나를 위해서, 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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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늘 큰 고비를 넘었다. 방금도 손이 떨렸는지 유리컵을 떨어뜨렸다. 일흔이 넘은 부산할매는 열정적으로 부동산에서 강연을 했다던데, 할매 딸 뻘인 나는 지금도 떨린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잘 싸워왔다.



참고 사진

https://www.youtube.com/shorts/J5gBkREJapY

https://m.youtube.com/watch?v=dOp0oWFHU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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