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touch me

정여울, '마흔에 관하여'

by 그럼에도


환불원정대, 'Don't touch me'


2부 나다울 시간

- 피스메이커를 졸업하며


과거의 나는 '피스메이커(peacemaker)'가 되기를 원했다. 솔직한 싸움보다는 미봉책으로서의 평화를 선택했다. '싸움닭'으로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싸우게 되면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게 될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었다. 하지만 남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고 쓰라린 내상이었다. 나는 '센 언니'로 보이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저쪽에선 '웃자'고 떠드는데 이쪽에서는 '죽자'고 덤빈다는 비판을 받기 싫었던 것이다. 점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술자리를 기피하게 된 것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성차별적인 요소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싸움을 피할수록,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여성들에게 '자유의 공간'이 줄어든다는 것을. 내가 싸워야 할 것은 남성들 자체가 아니라 남성들의 편견이라는 것을. 그러니 내게는 남성들과 변함없는 우정을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편견과 싸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 책의 글귀를 어딘가에서 만났다. 책을 검색해보고 ~순식간에 이끌리듯이 읽었다. 책 제목에서 처음엔 끌리지 않았다. 몇 살이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한다는 그런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제목에서 멈칫했지만 내용에 스르륵 빠져들었다. 책 내용은 새롭게 배우고 시작하는 내용이라 얼마 전 읽었던 '폴리매스'라는 책의 내용과도 큰 틀에서 같은 흐름을 느꼈다.


남과 다른 내가 틀린 나가 아닌 '나만의 독창성'과 새로운 시작과 배움을 향하는 과정이 좋았다. (40이 아니어도 배움의 관점에서 읽어보기를 추천~)


이 책의 앞에서 '피스메이커'가 등장한다. 얼마 전까지 나의 모습이라 읽는 동안 지난 상처가 다시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난 진정한 피스메이커였다. 피스메이커를 넘어 '거절 못하는 병'까지 갖고 있었다. 내 일 이외에도 남의 일도 떠맡고, 누구에게나 너무나 당연한 그런 사람. 부당함에도 말 못 하고, 집에 와서 울다가 결국은 불면의 밤을 보내던 그런 비굴함과 소심함이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이 병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만한 아픔과 꼭 바뀌겠다는 이런저런 각오로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외향적인 사람의 관점으론 이해하기 어렵지만 내향적인 사람의 변화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 밖으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이가 좀 먹어보니 회사에서 '피스메이커' 병을 고쳐야 하는 이유는 나라는 사람의 자존감 이외에 하나 더 있다. 자아실현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면 나의 경우는 직장에 돈을 벌기 위해 일하러 온 신성한(?) 생업의 현장이다. 나의 노력과 성과가 '평가절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할 말을 해야 한다.


일을 하고 성과가 좋았던 시기에 들었던 그 얘기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갖고 노력하고 결과가 나왔구나라는 인정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옆에서 남자 선배님 말씀 '할 일이 일 밖에 없는 싱글이라 일 잘한 거'(그다음 말은 더 별로인 노처녀 드립)라며 할 일 없어서 일에 집중하는 사람으로 농담으로 하고, 주변은 다들 웃었다. 커피타임에 난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했다. 단순히 기분 나쁜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여자라서 화가 난다는 것도 아니다. 나의 능력과 가치를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계산하는 회사에서 나의 가치를 '평가절하'한 것이다.


회사에서 내가 제일 못하는 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언제 말해야 할지를 모르는 겸손한 바보가 되어 늘 조용히 살았다. 그런 사람의 성과란 그냥 그런 사람이 '어쩌다 운 좋게 걸린 행운'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다.


peacemaker가 troublemaker가 되는 걸 원하지 않지만 한 번은 겪어나가야 할 과정. 나이 먹었다고 성격 나빠지는 게 아니라 나를 인정하고 표현하기 위해 할 말 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좋은 게 좋은 거', '둥글둥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란 말이 이기주의자와 나르시스트의 행복한 앞날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말 잘 듣는 피스메이커가 대신 일할 꺼니깐)


'Don't touch me'의 가사가 의미심장한 건 멈추지 않고 배우고 노력하되, 할 말은 꼭 하는~^^


나도 사랑을 원해~ 나도 평화가 편해~~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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