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음악이란 우주의 질서라고 한다
지금은 비록 피알못(피아노를 알지 못하는)이라도 어린시절 엄마 등쌀에 못이겨 피아노가방 들고 왔다갔다 해본 사람이라면 뭔가 피아노에 대한 애매한 동경 혹은 공포가 있다. 보통 끈기와 재능이 있다 판단되는 이들은 체르니 40번은 거뜬히 넘기고 체르니 50번까지는 친다. 그리고 이 무렵 좌절을 맛본다. 재능의 부족 또는 경제적 현실의 장벽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던 간에, 한 때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열정을 쏫았던 한 가지 일을 1) 꾸준히 할 수 있고, 그 일을 통해 영혼의 잠식없이 2) 생계를 유지하고, 이것이야 말로 주저없이 3) 나의 '업'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이에 더하여 꽤나 4) 많은 세상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주고, 기꺼이 자신의 돈과 시간을 내어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운 혹은 기적은 모두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아이는 공부에 재능이 없어, 음악이나 체육 쪽을 시켜봐야 겠다는 소리는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인 것이다. 공부야 말로 어쩌면 우리사회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는 밥벌이를 위한 가장 평이하고 무난한 선택지 일 수 있으니.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소네트(seymour, 2014)는 위에서 언급한 그런 재능이 있는 드물고 특별한 사람인 '세이모어 번스타인'이 피아노와 함께 한 인생 이야기를 잔잔한 인터뷰 형식을 빌어서 풀어낸다. 제자들이나 주변인들이 입을모아 연주자일 때나 친구 일때나 별반 다른 점이 없다는 게 그의 가장 큰 장점이라 말한다. 그래서 예술가 답지 않다고. 대중들은 광기어린 행동이나 압도하는 기괴함 같은 걸 위대한 예술가에게 기대하는 경향이 분명 있기는 한 것 같다. 기대한다기보다 어찌보면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렵고 그로테스크 하더라도 '예술은 그런 것'이라며 눈감아 주는 것일 수 있다. 세이모어는 그런 아티스트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예술은 삶의 다른 단어이며, 예술을 통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감동, 위로, 편안함 같은 말들에 더 가까울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아마도 무대 위의 화려함을 등지고 내려와 레슨을 시작한 게 아닐까. 어찌되었든 '에단호크'란 낚시밥에 걸려서 영화를 선택했다면 이 영화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감독으로서, 상업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의 영역까지 확장해가는 에단호크의 연출력에 관심이 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유난히도 한국에서 여성팬을 두둑하게 확보하고 있는 것 같은 '에단호크'. 아마도 '비포'시리즈(비포선셋, 비포선라이즈...)를 기점으로 그 열풍이 거세어졌을 것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빌자면 '위대한유산(Great expectations, 1998)'에서 수돗가 물 먹는 scene으로 청소년 시절 큰 충격을 받았던 나 같은 사람도 있을 거 같다.(로미오와 줄리엣 디카프리오 수족관 scene과 맘먹는 비주얼 쇼크)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이 80살이 넘은 피아니스트의 인생은 잔잔한듯 파란만장하다. 손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서 모든 음을 세게 건반을 연주하는 제자에게 '모든 음이 강하면 안돼.'라며 부드럽게 읖조리는 예술가. 6.25 참전용사로 한국전쟁 당시에 미8군에 소속되어 각 지를 돌아다니며 위문연주를 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한번도 실제로 보지 못한 미국인 피아니스트가 친근한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특히 인터뷰 중 당시 전장의 기억이 떠올라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참 생경하면서도 뭉클했다. 대한민국 땅에 태어나고 자라면서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세대로서 '참전용사'라는 말을 들으면 두 가지의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호국영령들의 희생을 통해 오늘 날의 이 나라가 있을 수 있었기에 그들에 대한 경외심. 다른 하나는 살아있는 자들이 제멋대로 정치적으로 이용하곤 하는 북한, 안보이슈와 같은 것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의 눈물에선 그저 단 한가지 생각만을 했다. 죽음이 도처에 널려있고,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공포가 현재진행중인 전장에서 조차 음악은 인간의 불안을 잠재우고 그들을 치유한다는 것이다.
엄청난 부와 명성을 뒤로하고, 연주자의 길에서 내려와 피아노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의 제자들을 인터뷰 하는 내용이 연주장면 사이사이에 등장한다.
클래식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귀에 익은 음악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서 화면에 녹아든다. 세이모어의 인생은 피아노라는 악기의 특성과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악기의 '끼익~'함을 별로 즐기지 않는 나로선 90분간 러닝타임 내내 정말 값비싼 공연을 소극장에서 맛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추천대상 : 마음이 어지럽거나,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다면. 영화음악이나 음악영화를 좋아한다면. 클알못이지만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