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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랭보 Aug 25. 2018

우리 각자의 뒷모습이 말해주는 것

 뒷모습을 기억한다는 건 조금 아픈 일이다. 영화<하나 그리고 둘>

영화는 대만의 한 교외 결혼식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풍경에서 시작된다. 신랑 신부로 보이는 이들을 중심으로 백발이 성성한 그들의 부모, 형제 및 친척들과 그들의 아이들까지. 10대부터 80대 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으로 구성된 다소 드물지만 교과서 삽화에 실릴법한 이상적인 모습이다. 밝은 표정 뒤로 푸릇푸릇한 녹지배경이 어우러지면서 잔잔한 햇살이 드리워진다. 이렇게 가까운 이들의 축복 속에서 한 쌍의 커플은 탄생한다. 영화의 시작치곤 무난하다 여기던 찰나가 무섭게 이러한 평온함은 곧 부서진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신랑(아디)의 전 여자친구의 등장으로 결혼식장은 술렁이고, 아디의 처남인 NJ(오념진)는 아수라장이 된 피로연장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다. 어떻게 잘 마무리되나 싶던 차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간 집에서 장모님이 갑작스레 쓰러지면서 의식불명 상태에 이른다. 친정엄마를 간호하던 중 아내인 민민은 우울증세를 보이며 집을 떠나겠단 선언을 하고 나가버린다. 이들 부부에겐 1남 1녀의 자녀들이 있다. 할머니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딸 팅팅, 그리고 또래보다 왜소한 체격으로 덩치 큰 여자아이들에게 조차 놀림을 받는 장난꾸러기 아들 양양까지. 감독은 가족 구성원과 그들을 둘러 싼 사람들 각각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세상에 사연 없는 집은 없다고 했던가. 아내의 부재를 틈타 첫사랑과의 재회로 잠시 위기에 빠진 NJ부터, 남편과 자식을 내팽겨 치고 아픈 엄마를 둔 채 도를 닦으러 들어간 아내 민민, 신혼부부인데도 전 여친과 잠자리를 갖는 것도 모자라 사기를 당해 빚을 지고 아내와 아이를 두고 자살시도 까지 하는 이 영화 속 가장 한심한 캐릭터인 처남 아디까지. 영화 속 이 집안의 어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어리석고 비겁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어른이라 할 만한 사람은 의식을 잃고 쓰러져 누워있는 할머니 뿐이다. 소극적이고 순종적인 성격인 손녀 팅팅이 할머니 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할머니가 이 가정에서 어떤 존재인지 느낄 수 있다.


영화의 묘미는 다소 가라앉은 듯한 잔잔한 분위기를 나름의 엉뚱함과 기발함으로 이끌어가는 NJ의 막내아들 양양을 지켜보는 데 있다. 아빠에게 받은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기 시작하는 꼬마에게 너는 왜 이런 걸 찍냐고 묻자 양양은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 뒷모습을 보지 못하잖아요."라고. 어린 꼬마가 이야기하기엔 다소 철학적인 대답이었다. 영화 후반부에 결국 할머니가 숨을 거둔다. 가족들은 저 마다의 굴곡과 갈등을 극복하고 할머니의 마지막 자리를 위해 장례식장에 모이게 된다. 120분 남짓의 러닝타임동안 초반부에 비해 각자의 방식으로 나름의 '성장'을 한 캐릭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망자를 추모하는 자리는 그 사람이 ‘의미있는 타인’일수록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제공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양양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 삼촌이며 아빠며 주변사람들의 뒷모습을 찍고 인화하여 선물하는 것은 객체에 대한 애정의 표시이기도 한다. 그 사진을 받아든 사람들은 낯선 각자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반응은 한결 같다. 뭔가 이전엔 느낄 수 없었던 자신을 마주한 탓인지 머쓱하면서도 영 싫지 않은 모습들이다.  

우린 각자의 뒷모습을 볼 수 없다. 아마도 영화에서 말하는 뒷모습이란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는 것, 자신도 너무 익숙해져버린 탓에 인지할 수 없는 나의 민낯 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내 뒷모습을 기억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닌,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즉 가족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목숨을 내어줄 만큼 사랑하는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부모의 모습이 있으며,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임에도 어느 날 문득 너무 낯설게 느껴진다 말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런걸 보면 ‘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알고 있다’는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이 알고 싶다’는 것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외려 더 나의 리얼한 민낯, 즉 뒷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나의 아픔과 상처, 어둡고 낮은 면을 내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간암투병 중에 요양병원에서 잠깐 나와 근처 계곡물을 보면서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식사를 했었다. 짧은 식사를 마치고 딸들에게 먼저 가라고 했지만 뼈밖에 남지 않은 수척해진 몸으로 병원 문을 향하는 아빠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몇해 전 여름 날 이어폰 한 쪽을 꽂은 채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나의 어린 동생의 지친 뒷모습도. 나는 왜 그 날 너의 뒷모습을 꽤 오래 봤던 걸까? 네 뒷모습에서 읽었던 그 것은 무엇이었나. 지금은 내 곁에 없는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이 여전히 또렷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가끔 그런 장면들이 떠올라 마음이 많이 힘들다. 부디 남겨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의 뒷모습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와 함께라면 아무리 웃어도 부족하지 않을 시간 뿐이라 뒷모습을 볼 기회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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