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은 참 추웠다.
겨우내 살아남기 위해 나뭇잎을 다 떨어버린 나무들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아무리 옷을 여며봐도 바람은 몸 속으로 들어왔다.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정말이지 쨍하기 그지없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날씨인지. 높은 하늘과 앙상한 나뭇가지. 이 모든걸 사랑하는 나였지만 그날따라 겨울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여름이었다면 이정도로 서럽진 않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취준생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를 하는 열정의 20대' 였지만, 현실은 청년실업 몇백만의 일부를 구성하는 쟂빛 구성원이었다. 그 해 나는 두번째 시험에 떨어지고 다시 시험을 준비할 것인지, 이력서를 내고 취업전선에 뛰어들 것인지 고민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민도 배가 불러야 가능한 일인것 같았다. 노량진 학원 앞 트럭에서 이천원하는 귤 한 망을 사먹고 싶었는데 그 돈이면 차라리 점심에 제육볶음을 먹는게 낫겠다 싶어 고민하던 어느날 문득, 그냥 배부르게 살자 싶었다. 꿈이고 낭만이고 모두 지긋지긋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 아르바이트 학생을 구한다고 했다. 기간은 딱 10일이었고, 시간은 하루 두세시간만 도와주면 된다고. 그리고 받는 돈은 30만원이라고 했다. 따져보니 시급 만원꼴의 고급 알바였고, 당연히 하겠다고 했다.
그는 정치와 관련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쪽 일에 워낙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던 상관이 없었다. 그 추운 겨울, 나는 매일 그 사람의 사무실 문을 열었고, 가끔 오는 손님들에게 커피를 대접했고, 우편물을 분류했으며, 가끔 혼자 짜장면으로 한끼를 먹었다. 그 사람이 준비하던 어떤 행사를 위해 전화를 받았고, 안내했으며, 책자를 보냈다. 작은 사무실이었지만 혼자 있으니 온기가 전혀 없었고 매일같이 히터를 틀었지만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주어진 일을 나름 열심히 했다. 아니, 한다고 했다.
10일 후. 마지막날. 나는 그에게 갔다. 그리고 공손히 말했다. "저 오늘이 마지막인데요.."
그는 힐끔 나를 보았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사람, 오늘 나를 처음 봐주는구나'
그는 지갑을 열었다. 그리곤 거칠게 삼십장을 세더니 인심쓰듯 한장을 더 빼면서 내 앞에 들이밀었다. 애초부터 예쁘게 봉투에 넣어줄거라는 기대따윈 하지 않았지만 왠지 그 순간 내가 한없이 초라했다.
'잘가'
그 흔한 수고했어, 한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감사인사와 함께 뒤돌아서던 나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당신 말야, 좀더 배워야겠더라. 커피타는것도 그렇고, 상냥하게 애교있게 웃는것도 그렇고.'
왠지 슬펐다. 난 일개 10일짜리 알바일 뿐인데 뭘 그리 의미를 두었나 싶으면서도, 내가 지금껏 어떻게 살았건 무엇을 하며 살았건 그냥 존재감 작은 취준생일 뿐이구나. 싶었다. 알바비 삼십일만원은 몇달동안 쓰지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왠지 이걸 써버리면 그날의 초라한 내가 더 초라해 보일것 같은 그런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랄까.
며칠 전 어느날 오후. 우연히 그 사람을 보았다. 벌써 십년도 더 된 세월에 많이 늙어버린 그 사람의 얼굴에서 그때보다 훨씬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그 좋은 풍채는 어디로 가고 비쩍 마른 몸에 지독한 향수냄새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능글한 사회적 웃음과 기름을 발라 착 뒤로 넘긴 머리는 여전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당연히
바로 옆에서 인사한 날 알아보지 못했다. 하하.